[김기정의 와인 이야기] 애슐린이 선정한 소장용 와인- 와인은 시간을 소장하고 공유하는 문화
2025년 12월 5일 오후 서울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아주 잠깐 내린 것 같았는데 함박눈이 순식간에 쌓이면서 퇴근길이 엉망이 됐습니다. “차를 버리고 3시간 걸어 집에 갔다” 등등 훗날 수많은 무용담이 쏟아졌습니다. 첫눈 온 다음 날 신세계 강남점의 ‘하우스 오브 신세계’에선 독특한 와인 시음회가 열렸습니다.
프랑스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인 애술린(Assouline)과 희귀한 올드 빈티지 와인을 수입해 판매하는 럭셔리 와인 컨시어지 클럽인 샤또에도멘(Chateau et Domaine)이 컬래버 한 와인 시음회입니다. (통상 Chateau는 샤토로쓰나 ‘샤또에도멘’은 사업체명으로 샤또로 표기합니다.) 샤또에도멘과 애술린이 컬래버 한 이유는 ‘와인에 접근하는 방식’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날의 주제는 ‘귀족들의 컬렉션:시간의 예술을 수집하다’였습니다. ‘시간’을 ‘예술’로 재해석해 진정한 럭셔리는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샤또에도멘 관계자는 “세월의 숨결이 깃든 와인은 한 시대의 기억이자 귀족적 미학이 응축된 예술품”이라면서 “와인을 통해 시간을 수집하는 문화를 완성하려고 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날 시음회는 애술린의 와인 서적인 에 소개된 100개 와인 중 5개가 소개됐는데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면 ‘궁극의 소장용 와인’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마시기 위한 와인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소장해도 좋은 와인이란 뜻입니다. 애술린은 서적 판매와 서점(부티크)을 운영합니다. 애술린 서점에서는 책 이외에도 미술작품, 빈티지 제품, 디자인 상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애술린의 책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애술린 책에 소개된 것만으로도 명품 브랜드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술린 관계자는 “책을 지식 전달의 매개체가 아닌 하나의 오브제이자 예술작품으로 재해석한 브랜드”라며 “애술린의 서적은 귀족들의 서재처럼 세월이 쌓인 취향과 안목을 담아 컬렉팅(Collecting)의 경험을 제안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와인은 시간을 병에 담고, 애술린은 시간을 책에 담아
애술린에 따르면 실제 13세기 유럽에서 책은 금보다 귀한 소장품이었다고 합니다. 손으로 필사하고 양피지와 금박장식까지 수작업으로 만들어져 극소수의 상류층만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희귀하고 럭셔리한 오브제였던 겁니다. 애술린은 당시 장인들의 제작방식을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되살려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책을 만듭니다. 와인의 실제 레이블을 뜯어 하나하나 풀로 붙여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애술린 관계자는 “와인은 시간을 소장하고 공유하는 문화이고 이는 애술린의 정체성과 유사하다”라고 말합니다. 이어 “와인은 시간을 병에 담고 애술린을 시간을 책 페이지에 담기에 와인과 좋은 책은 결국 우리 인생의 친구가 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이날 소개된 5개 와인은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라 그랑드 담(La Grande Dame) 2012, 클로 데 파프(Clos des Papes) 샤토뇌프 뒤 파프(Chateauneuf du-Pape) 1993, 도멘 오귀스트 클라프(Domaine Auguste Clape) 코르나스(Cornas) 1996, 샤토 레오빌 라 카즈(Chateau Leoville Las Cases) 클로 뒤 마르키(Clos Du Marquis) 1999, 크루그(Krug) 빈티지(Vintage) 브뤼(Brut) 2011입니다.
럭셔리는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
1번 와인 뵈브 클리코는 과부 클리코라는 뜻입니다. 뵈브클리코 라 그랑드 담 샴페인은 27세에 미망인이 된 후 혁신적인 방법으로 샴페인 사업을 이끌어간 클리코 여사의 업적을 기린 샴페인입니다. 샴페인은 투명한 황금색 액체를 타고 올라오는 영롱한 기포들이 특징이지만 클리코 여사 이전의 샴페인은 불투명하고 탁한 샴페인이었습니다.
클리코 여사는 리들링이란 방법으로 효모 찌거기 등 침전물을 걷어내 맑은 샴페인을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라 그랑드 담 샴페인은 샴페인의 위대한 여성이란 의미입니다.
2번 샤토뇌프 뒤 파프와 3번 코르나스는 각각 남부 론과 북부 론을 대표하는 와인입니다. 2번 ‘교황의 와인’이라 불리는 샤토뇌프 뒤 파프는 남부 론 지역의 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 3개 포도 품종을 혼합해 만듭니다. 클로 데 파프 샤토뇌프 뒤 파프는 교황의 와인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교황의 삼중관, 성 베드로의 열쇠, 고딕체 문구가 새겨진 전용 문장병을 사용합니다. 3번 코르나스는 북부 론 지역의 시라 포도 품종을 사용합니다. 시라는 호주로 넘어가면서 ‘시라즈’가 됩니다. 오귀스트 클라프 코르나스는 100% 시라를 사용한 장기숙성형 와인으로 스파이시한 맛이 특징입니다.
각각 1993년, 1996년 올드 빈티지라 와인의 맛이 꺾여 있을까 걱정했는데 짱짱하게 살아 있어 놀라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올드 빈티지 와인을 맛볼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막연히 오래될수록 좋다는 올빈 와인에 대한 판타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20년 이상을 버틸 수 있는 와인은 흔치 않습니다. 보관 상태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힘이 빠진 경우가 상당수입니다. 또 코르크 마개를 열자마자 순식간에 식초로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4번 샤토 레오빌 라 카즈는 프랑스 보르도 생쥘리앵 지역의 와인입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를 혼합했습니다. 프랑스 와인이지만 신대륙 미국 와인의 느낌이 많이 난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설명입니다. 1999년 빈티지로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보르도 블렌딩의 강건함이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샴페인 크루그입니다. 샴페인을 식전주로 많이 생각하지만 과거 샴페인은 디저트 와인으로 많이 사용 됐습니다. 최근 들어 샴페인을 점점 드라이하게 만드는 추세지만 과거에는 매우 달달한 샴페인이 인기였습니다. 실제 샴페인의 제조과정에서 설탕을 추가하는 경우도 많았고, 설탕 추가를 표기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붙기도 했습니다. 이날 소개된 와인들은 하나하나가 ‘소장용’에 걸맞은 와인이지만 이 중 꼭 1개만을 꼽으라면 저는 크루그를 선정할 것 같습니다. 압도적인 향과 맛, 롱 피니시까지 근래 마셔본 샴페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냈습니다. 얘슐린은 ‘와인’ 책과 별도로 ‘샴페인’ 책을 따로 만들었는데 크루그는 와인 책과 샴페인 책 양쪽에 모두 소개됐습니다.
샤또에도멘 관계자는 “크루그 샴페인은 유명해서 잘 만들었다고 느껴지기보다는 정말로 잘 만들어서 유명한 샴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