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정의 와인 이야기] – 첫사랑 같은 와인, 피터 마이클 ‘꾸안꾸’ 오크 숙성 샤르도네
지금도, 가끔 떠오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요.
그런데 문득 궁금해집니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요. 혹시 일부러 다시 만나보려 한 적이 있나요? 저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길을 걷다 우연히, 혹은 어느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마주치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아마도 피천득의 수필 <인연> 때문일 겁니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이 문구는 여전히 제 안에 문신처럼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이럴 때 MBTI에선 ‘T’라고 하나요 ‘F’라고 하나요?).
그런 첫사랑 같은 와인이 있습니다. 가끔 생각은 나지만 억지로 찾아 마시고 싶지는 않은. 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첫 만남이 너무 강렬했고 좋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깨고 싶지 않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피터 마이클(Peter Michael) 샤르도네입니다.
처음 이 와인을 마셨을 때의 기억은 꽤 선명합니다. 향을 맡는 순간의 부드러움, 입안에 퍼지던 질감, 그리고 뒤에 길게 남던 팔색조 같은 여운까지. 와인 취향의 기준점이 ‘구조’와 ‘균형(밸런스)’으로 넘어가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수많은 와인을 마셨습니다. 더 비싼 와인도 있었고, 더 희귀한 와인도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압도적이었고, 어떤 것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피터 마이클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와인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난 첫사랑처럼 재회한 피터 마이클
그 피터 마이클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얼마 전 와인나라가 반포 세빛섬 무드서울에서 연 제임스 서클링 TOP 100 스페셜 테이스팅에 피터 마이클이 나와있었습니다. 세계적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이 선정한 와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였지만, 제 눈에는 여전히 피터 마이클이 가장 먼저 들어왔습니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그렇지 않을까요.
피터 마이클은 다양한 종류의 샤르도네를 만듭니다. ‘이건희 회장의 와인’으로도 유명한 벨 코트(Belle Cote), 마 벨피(Ma Belle-Fille), 라 카리에르(La Carriere) 등이 한국에서 유통되는 피터 마이클 샤르도네입니다. 나머지 피터 마이클 샤르도네는 생산량이 적고 가격도 높아 쉽게 접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뉴욕 맨해튼의 여러 와인숍을 돌아다녀도 매장에서 피터 마이클을 발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마치 에르메스 버킨백처럼요. 존재는 분명하지만 아무 때나 만날 수는 없는 대상입니다. “미국에 가면 보리차처럼 실컷 마셔봐야지”라고 마음먹었다가, 결국 비슷한 스타일의 와인을 추천받고 돌아섰다는 애기를 많이 듣습니다.
피터 마이클은 캘리포니아 와인이지만 스타일은 프랑스 부르고뉴에 가깝습니다. 피터 마이클 와인을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오크 숙성입니다.
피터 마이클은 최고급 프렌치 오크를 사용하고, 오크통 내부를 불로 그슬리는 ‘토스팅’ 과정을 통해 향과 질감을 정교하게 설계합니다. 이 과정에서 바닐라, 캐러멜, 토스트, 커피 같은 복합적인 아로마가 형성되고, 질감은 더욱 부드럽고 입체적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크를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많은 캘리포니아 샤르도네가 오크와 젖산 발효를 강조해 버터리하고 풍부한 스타일을 만들어 냅니다. 때로는 그것이 과해져, 와인의 본질보다는 ‘만들어진 맛’이 더 앞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오크 숙성을 ‘화장(makeup)’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합니다. 생얼이 예쁜 게 아니고 화장발이라는 거지요.
최근에는 화장발 와인에 대한 반작용으로, 스테인리스 숙성을 통해 포도 본연의 순수한 맛을 강조하는 와인 양조 스타일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제임스 서클링 역시 자신의 뉴질랜드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은 “화장기 없는 깨끗한 와인”을 지향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꾸안꾸’ 샤르도네의 설득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터 마이클은 이 논쟁에서 조금 비켜 서 있습니다. 파터 마이클 와인의 경우 오크는 분명 존재하지만, 절대 과장되지 않습니다. 느껴지지만 튀지 않고, 드러나지만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꾸민 와인’이 아니라, 오히려 ‘꾸안꾸’에 가까운 스타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 지점이 바로 피터 마이클의 설득력입니다.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맛있는 와인”으로 다가오고,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복합미와 롱피니시, 밸런스가 좋은 잘 만들어진 와인”으로 읽힙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와인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부르고뉴 그랑크뤼 샤르도네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부르고뉴는 때로는 인생 와인이 되지만, 때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합니다. 빈티지, 생산자, 보관 상태에 따라 경험의 편차가 큽니다. 반면 피터 마이클은 비교적 안정적인 완성도를 유지합니다. 언제 마셔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을 보장하는 ‘신뢰 가능한 와인’입니다. 스타일로 보자면, 풍부하고 크리미한 질감의 뫼르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보다 친절하고, 보다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어쩌면 우리는 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와인을 처음 마셨던 ‘기억’을 마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피터 마이클은 여전히 제게 첫사랑 와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만나길 기대하게 하는, 여전히 설레는. 첫사랑이 대개 그렇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