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정의 와인 이야기] 크레망 드 부르고뉴
대담하고 깜찍한 상상력이 빚어낸 버블
스파클링 와인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습관처럼 ‘샴페인’을 기준으로 얘기하게 됩니다. 축하의 순간, 특별한 날, 고급 레스토랑의 디너 테이블까지. 샴페인은 오랫동안 스파클링 와인의 왕좌를 지켜왔고, 지금도 그 지위는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샴페인의 명성과 품질은 분명 스파클링 와인의 기준이 될 만합니다.
부르고뉴는 스틸 와인의 땅입니다.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라는 두 개의 위대한 품종이 부르고뉴를 넘어서 세계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부르고뉴의 레드와 화이트만 제대로 이해해도 와인의 절반은 배운 셈”이라고.
센스 있는 와인 소비자라면 어느 날 이런 대담하면서도 깜찍한 상상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르고뉴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면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르고뉴는 스파클링 와인도 ‘잘’ 만듭니다. 단순히 ‘샴페인 비슷한 와인’이 아니라, 부르고뉴 특유의 질감과 과실미, 그리고 우아한 산도를 가진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샴페인의 그림자 아래 있는 이름이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빛을 내기 시작한 카테고리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스파클링 와인이 바로 크레망 드 부르고뉴(Crémant de Bourgogne)입니다.
‘샴페인 비슷한 와인’을 넘어선 크레망의 진화
최근 서울에서 부르고뉴와인협회가 주최한 크레망 드 부르고뉴 마스터클래스에서도 이런 변화가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날 세미나는 부르고뉴 와인 공식 인증 강사인 이인순 원장과 2023년 한국 소믈리에 대회 우승자 윤효정 소믈리에가 진행해 참석자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간단하게라도 용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 레드·화이트 와인은 스틸 와인, 기포가 올라오는 뽀글이 와인을 ‘스파클링’ 와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중 특히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나오는 스파클링 와인만을 ‘샴페인’이라고 부릅니다. 샹파뉴 외에 프랑스 다른 지역에서 샴페인과 같은 전통 방식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 중 ‘크레망(Crémant)’이 있습니다. 생산지에 따라 부르고뉴에서 생산됐으면 크레망 드 부르고뉴, 보르도는 크레망 드 보르도, 루아르는 크레망 드 루아르, 쥐라는 크레망 뒤 쥐라, 알자스는 크레망 달자스라고 합니다.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의 스파클링 와인으로는 이탈리아의 프로세코와 아스티, 스페인 카바, 독일 젝트 등이 유명합니다.
현장에서는 다양한 크레망 드 부르고뉴가 소개됐고, 참석한 업계 관계자들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완성도에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섬세하게 이어지는 기포, 효모 숙성에서 오는 고소한 풍미, 그리고 예상보다 긴 피니시까지. 한 소믈리에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라면 샴페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생산 방식만 놓고 보면 크레망 드 부르고뉴와 샴페인은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둘 다 병 안에서 2차 발효를 진행하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효모와 함께 숙성하며 복합적인 풍미를 얻고, 섬세한 기포를 완성합니다. 기술적인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결국 차이를 만드는 것은 지역과 품종, 그리고 철학입니다.
여기서 크레망 드 부르고뉴의 개성이 드러납니다. 샴페인이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라는 세 품종 중심으로 만든다면, 크레망 드 부르고뉴는 포도 품종에서 훨씬 자유롭습니다.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는 물론이고 가메이, 알리고테, 피노 그리, 피노 뫼니에 등 다양한 품종이 사용됩니다. 덕분에 스타일의 폭도 넓습니다. 어떤 것은 산뜻하고 가볍고, 어떤 것은 부르고뉴 화이트처럼 크리미하며, 또 어떤 것은 붉은 과실 향이 풍부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자유로움이 약점으로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부르고뉴 최고의 품종인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만으로 승부를 보면 더 강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크레망 드 부르고뉴의 등급으로 최근 등장한 ‘에미넝(Eminent)’과 ‘그랑 에미넝(Grand Eminent)’은 이런 기대를 정확히 읽어낸 듯합니다.
특히 그랑 에미넝은 최소 36개월 숙성, 엄격한 압착 기준, 낮은 도사주 등 훨씬 강화된 규정을 적용합니다. 그리고 핵심은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 중심의 블렌딩입니다. 즉, 크레망 드 부르고뉴가 본격적으로 프리미엄 스파클링 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가성비 좋은 스파클링”이 아니라, 진지하게 품질로 경쟁하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집니다.
샴페인의 대체재가 아닌, 크레망이라는 선택
물론 아직은 샴페인의 브랜드 파워를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레스토랑에서도 여전히 첫 번째 선택은 샴페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기포의 지속력이나 숙성 복합미에서도 최상급 샴페인이 보여주는 깊이는 쉽게 대체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크레망 드 부르고뉴의 존재감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소비자들은 단지 유명한 이름보다, ‘무엇을 마시느냐’ 자체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레망 드 부르고뉴는 그 질문에 꽤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샴페인 대신 크레망을 마셔도 될까?”가 아니라, “왜 지금 크레망 드 부르고뉴를 마셔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크레망 드 부르고뉴는 샴페인을 대신하기 위해 존재하는 와인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카테고리이며, 샴페인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하는 와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