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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정의 와인 이야기] 샤토 피숑 롱그빌 바롱 - 정장을 입은 검은 말 같은 와인

  • 김기정 기자
  • 입력 : 2026.08.31 16:02
  • 수정 : 2026.08.31 16:03

힘이 넘치지만 무례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과장되지 않는다. 포이약의 명문 샤토 피숑 바롱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정장을 입은 검은 말’이다.

샤토 피숑 롱그빌 바롱
샤토 피숑 롱그빌 바롱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개의 전설

보르도 와인은 지롱드강을 기준으로 좌안(Left Bank)과 우안(Right Bank)으로 나뉜다. 좌안에는 이른바 ‘5대 샤토’인 라피트 로칠드, 라투르, 무통 로칠드, 마고, 오브리옹이 있다. 이 중 세 곳이 메독의 포이약(Pauillac)에 있다. 좌안 메독에서도 가장 명성이 높은 산지다. 샤토 피숑 롱그빌 바롱은 1등급 샤토 라투르에서 1km가 채 안 되는 포이약 남부 자갈 언덕에 있다. 두 포도밭이 붙어 있지는 않지만, 피숑 바롱의 핵심 구획에서는 라투르의 포도밭이 내려다보인다.

지참금에서 태어난 피숑

피숑 바롱의 역사는 루이 14세 시대인 17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689년 와인 상인이자 라투르와 마고의 관리인이었던 피에르 데메쥐르 드 라우장은 라투르 인근의 포도밭을 사들여 ‘앙클로 라우장(Enclos Rauzan)’이라 이름 붙였다. 5년 뒤인 1694년, 그의 딸 테레즈는 보르도 의회 초대 의장 자크 드 피숑-롱그빌 남작과 결혼하며 이 포도밭을 지참금으로 가져갔다.

피숑 롱그빌 영지는 이렇게 시작됐고,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피숑 가문에 머물렀다.

하나의 영지에서 두 개의 피숑으로 피숑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1850년이다. 조제프 드피숑 롱그빌 남작이 세상을 떠나며 영지를 두 아들과 세 딸에게 나눠줬다. 아들 라울이 받은 몫은 오늘의 샤토 피숑 롱그빌 바롱이 됐다. 딸들 중 비르지니가 랄랑드 백작과 결혼해 자기 몫을 관리하면서, 그 이름을 딴 샤토 피숑 롱그빌 콩테스 드 랄랑드가 생겨났다. 남작(Baron)과 백작부인(Comtesse), 두 이름은 이때 갈라진 남매의 신분에서 나왔다. 뿌리는 같지만 스타일은 달라졌다. 메를로 비중이 높은 콩테스가 더 부드럽다면, 카베르네 소비뇽이 지배하는 바롱은 처음부터 강건한 쪽으로 기울었다.

1855년 등급, 그리고 ‘슈퍼 세컨드’

자부심이 강했던 라울은 1851년 르네상스풍 샤토 건설을 의뢰했다. 두 개의 원형 첨탑을 가진 이 건물은 오늘날 피숑 바롱의 상징이 됐다. 이듬해인 1855년, 나폴레옹 3세가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요청한 보르도 등급 분류에서 피숑 바롱은 피숑 콩테스와 함께 2등급으로 지정됐다. 이웃 무통 로칠드가 오랜 로비 끝에 1973년 1등급으로 승격되기 전까지, 두 피숑은 포이약에 남은 단 두 곳의 2등급 샤토였다.

1855년 등급은 지금까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품질이 당시 서열을 넘어선 샤토를 두고 ‘1등급에 가장 가까운 2등급’, 또는 ‘슈퍼 세컨드’라는 말을 쓴다. 피숑 바롱은 그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 중 하나다.

침체를 지나 다시 세운 명성

피숑 바롱의 영광이 순탄하게 이어진 것은 아니다. 1933년 피숑 가문은 샤토를 부테이예 가문에 팔았고, 1960~1970년대 샤토 피숑 롱그빌 바롱 와이너리 전경.

보르도 전체가 겪은 침체 속에서 존재감을 잃었다. 반전은 뜻밖의 곳에서 왔다. 1987년, 프랑스 보험회사 악사(AXA)의 와인 자회사 악사 밀레짐이 피숑 바롱을 인수했다.

보험회사가 명문 샤토를 산다는 소식에 처음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악사 밀레짐은 대대적인 투자와 엄격한 포도 선별, 현대적 양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웃 샤토 린치 바주를 이끌던 장미셸 카즈를 경영자로 영입해 포도밭과 설비를 정비했고, 2000년그가 물러난 뒤에는 크리스티앙 실리가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에 이른다.

파리 퐁피두센터와 협력한 건축 공모를 거쳐 1988년부터 발효조와 저장고를 전면 재건하고 샤토도 복원했다. 성 앞 수면에 두첨탑이 비치는 지금의 풍경도 이때 만들어졌다. 2008년에는 그 연못 아래에 지하 저장고를 지었다. 물과 하늘을 향해 열린 이공간을 샤토 측은 쥘 베른의 소설 속 잠수함 ‘노틸러스호’에 비유 한다.

정장을 입은 검은 말

피숑 바롱의 중심에는 언제나 카베르네 소비뇽이 있다. 자갈이 많은 포이약의 땅에서 자란 포도는 짙은 검은 과실 향과 단단한 골격을 남긴다. 이 와인의 매력은 힘 그 자체보다, 그 힘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잘 재단된 정장이 근육을 감추듯, 절제된 품격속에 강한 에너지를 숨긴다. 어릴 때는 팽팽하고 엄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긴장이 풀리며 균형이 드러난다.

피숑 바롱을 마신다는 것은 값비싼 보르도 와인 한 병을 여는 일만은 아니다. 지참금으로 시작된 와인의 역사, 상속으로 갈라진 남매의 운명, 침체 끝에 새 주인을 만나 되살아난 반전, 그리고 라투르 옆에서 자신을 증명해 온 시간이 잔에 함께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