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주형기 “골프와 음악, 결국 폴로스루(Follow Through)가 중요하죠”
건반에서 필드까지, 피아니스트 주형기는 완벽함보다 ‘실수의 마법’을 믿고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클래식 음악에 유머와 장난기를 더하며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어 온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주형기. 스스로 골프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돌이켜보면 골프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 가까이에 있었다. 영국에서 TV로 골프를 보던 소년은 이제 음악과 골프 사이에서 의외의 닮은 점을 발견한다. 호기심을 따라 익숙한 경계를 넘나드는 주형기와 음악, 그리고 골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골프와는 언제 처음 인연이 닿았나요.
먼저 고백하자면 저는 골프를 잘 알지도 못하고 골프를 이야기할 만큼 경험이 많은 사람도 아니에요. 다만 어린 시절 영국에서 TV로 골프 경기를 꽤 즐겨 봤습니다. 잭 니클라우스나 세베 바예스테로스 같은 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분명 좋아했던 것 같아요. 작은 흰 공이 멀리 날아가 조그만 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어린 제 눈에는 꽤 마법처럼 보였거든요. 특히 해설자가 “홀인원!”이라고 외치는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가 골드핑거와 골프를 치는 장면도 굉장히 좋아했고요.
전 세계를 다니며 연주하는 생활에서 골프는 어떤 매력이 있나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살다 보면 연습하고, 작곡하고, 공부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해서 운동을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의식적으로 스포츠를 생활 안에 넣으려고 합니다.
사실 어릴 때는 골프가 저와 잘 맞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피아노 앞에서 몇 시간씩 집중한 다음 또 공 하나를 놓고 몇 시간을 집중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죠. 축구나 테니스, 수영처럼 몸을 많이 움직이는 운동이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골프는 자연 속에서 날씨와 공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아름답더라고요. 지금 제가 골프를 더 자주 친다면 아마 일에서 잠시 떨어져 머리를 비우는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아요.
피아노와 골프가 닮았다고 느끼는 부분도 있나요.
많죠. 그중에서도 ‘폴로스루’가 흥미로워요. 피아노도 건반을 누르는 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뒤의 소리를 듣고 어떻게 이어갈지를 생각해야 하죠. 음악이든 골프든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결과를 먼저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골프에는 홀이라는 목표가 눈앞에 있고, 결국 모든 움직임은 그곳을 향해 가는 것이니까요.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연주하는 것과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티샷을 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긴장될까요.
골프요. 그건 저는 정말 못 할 것 같아요. (웃음) 최근 배우 톰 히들스턴의 인터뷰에서 ‘압박감은 특권’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긴장과 설렘은 몸에서 비슷하게 작용하니까 ‘긴장된다’고 생각하기보다 ‘설렌다’고 받아들인다고 하더군요.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그 특별한 감정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일종의 ‘희귀한 공기’라고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무대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적은 많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무대를 향해 뛰어가야겠죠. 그래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티샷을 하는 건 아직 자신 없습니다. (웃음)
음악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히 큰 것 같습니다.
저에게 호기심은 뇌와 영혼을 살아 있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힘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현재 가진 정보에 기반한 것이어서 언젠가는 틀린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잖아요.
또 저는 호기심과 창의성이 쌍둥이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가장 짧고 익숙한 길로만 가지 않고 가끔 다른 길을 선택해 보는 거죠. 그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무언가가 인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으니까요.
클래식에 유머와 장난기를 끌어들인 것도 그런 호기심 때문이었나요.
클래식 공연장의 지나치게 엄숙한 분위기나 엘리트주의적인 태도, 관객과 제대로 소통하지 않는 방식에는 늘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음악을 사랑하는데도 공연장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었죠.
십 대 초반에 청각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아이들이 피아노 아래로 들어가기도 하고 악기를 만지고 춤을 추기도 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음악은 정확한 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동과 에너지, 울림이기도 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나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더 많은 사람이 클래식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제게 중요한 일이 됐어요.
지금의 주형기를 만든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는다면요.
열 살에 예후디 메뉴인 스쿨에 들어간 일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선생님들은 지금까지도 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메뉴인의 80세 생일 음악회에서 그와 함께 무대에 섰던 일도 아주 특별했고요. 24세에 처음 한국을 찾아 서울시향과 KBS교향악단 연합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한 것도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빌리 조엘을 비롯해 정말 다양한 음악가와 예술가를 만날 행운이 있었습니다. 션 레넌과 친구가 되면서 요코 오노와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로저 무어와는 유니세프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가까운 친구가 됐어요. 그런 만남들이 음악 밖의 세계를 바라보는 제 시야를 계속 넓혀줬습니다.
요즘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있나요.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세이 이구데스만과 21년간 듀오로 활동하며 클래식 음악을 조금 더 재미있고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올해 초 듀오 활동을 마무리한 뒤에는 음악의 본질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을 많은 사람과 나누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홍콩 필하모닉과 선보일 <Piano vs. Orchestra>, 소프라노 아스믹 그리고리안과의 <A Diva Is Born>을 비롯해 여러 음악가와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고 교육과 마스터클래스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메뉴인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의 예술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피터 유스티노프 재단 홍보대사로서 어려운 환경에 놓인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도 큰 의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르완다 키갈리에 어린이 음악학교를 세우는 일도 돕고 있어요.
한국계 영국인 아티스트인 주형기에게 한국은 어떤 곳인가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굉장히 한국적인 가치관 속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영국에서 한국의 문화와 교육을 알리는 데 평생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영국에 합기도를 소개했고, 어머니도 한국과 교육, 평화를 위해 오랫동안 활동하셨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제게 굉장히 깊고 자랑스러운 부분이에요. 최근 몇 년 동안은 매년 한국을 찾고 있고 지난해에는 부산콘서트홀 개관 공연에도 참여했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라고 느껴요. 앞으로는 한국의 예술과 교육에도 제가 가진 경험과 아이디어를 더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아직 하지 못했지만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젊은 음악가, 유스 오케스트라와 더 많이 작업하고 싶어요. 자연스럽게 지휘도 더 많이 하고 싶고요. 재즈 즉흥연주도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음악 밖에서는 춤도 배우고 싶고 테니스와 서핑, 스카이다이빙에도 도전해 보고 싶어요. 스카이다이빙은 한 번이면 충분할 것 같지만요. (웃음) 그리고 골프도 더 많이 쳐야겠네요. 그래야 <매경GOLF>에서 저를 다시 인터뷰해 주지 않겠어요?
클래식 연극 영화 교육 창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콘텐츠 역사를 만들고 있는 호기심 많고 유쾌한 그를 한국에서도 자주 만나고 싶다면 욕심일까. 공연장에서든 필드에서든 그를 만나면 상상 그 이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