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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준의 GOLF & CULTURE] 독하게 이기는 것보다 멋지게 비기는 법

  • 오상준
  • 입력 : 2025.12.03 15:56

라이더 컵에서는 서로 경쟁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선전을 응원하는 훌륭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준 선수에게 니클라우스-재클린 상을 수여한다. 상대를 공격하고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 된 지금, 우리는 니클라우스와 재클린이 라이더 컵에서 보여준 스포츠맨십처럼 독하게 이기는 것보다 멋지게 비기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월드히코리오픈 개인전에서 함께 라운드 한 오상준 소장과 일본히코리골프 회원들.
월드히코리오픈 개인전에서 함께 라운드 한 오상준 소장과 일본히코리골프 회원들.

우리는 비정한 세계에 살고 있다.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핏불(Pitbull)처럼, 내편과 네 편을 가르고 경쟁에서 상대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주위는 그런 일로 가득하고 그렇게 무서운 일들이 매일 뉴스에 나온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우리의 아이들은 그런 사회에서 자라고 있다.

올바른 길로 가고자 하는 부모라면, “그래 너도 상대가 죽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말고 공격해서 이겨라”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맨날 얻어맞고 다니거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해한다. 우리 세대가 만들어 놓은 서글픈 현실을.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독하게 이기는 것보다 멋지게 비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에게 자극이 돼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관계, 진정한 경쟁자, 상대의 실수로 이기기를 바라는 것보다 상대방의 선전을 응원하는 관계… 바로 토니 재클린과 잭 니클라우스가 남긴 일화처럼 말이다.

1969년 라이더 컵에서 전대미문의 일이 일어났다. 잉글랜드의 로열 버크데일에서 펼쳐진 이 대회의 승패는 마지막 날 마지막 경합까지 이어졌다. 영국의 토니 재클린과 미국의 잭 니클라우스는 마지막 홀에서 둘 중 하나가 이겨야 1점을 보태어 자국팀에 승리를 안겨줄 수 있었다. 먼저 시도한 롱 퍼트를 홀 가까이에 붙인 니클라우스. 만약 재클린이 60cm 정도 남은 퍼트를 놓치면 미국팀의 승리였다.

그때 니클라우스는 재클린의 공을 집어 들고 악수를 청했다. 미국팀의 주장인 샘 스니드와 동료들이 황당해한 것도 당연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야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지만 니클라우스는 달랐다. 상대의 실수를 바라는 것이 골프 본연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중에 기자가 물어보니, 니클라우스는 “재클린이 그런 짧은 퍼트를 놓칠 리가 없다”라고 말하며, 이기기 위해 상대를 압박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 후 재클린과 니클라우스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플로리다에 함께 설계한 ‘Concession’이라는 이름의 골프장을 만들었다. Concession은 ‘양보’라는 뜻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 아닌가. 멋지게 비기는 법을 골프를 통해 만천하에 보여준 니클라우스. 그래서 라이더 컵에서는 훌륭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준 선수에게 니클라우스-재클린 상을 수여한다.

개인전 둘째 날 경기가 열린 몬트로스 링크스 18번홀.
개인전 둘째 날 경기가 열린 몬트로스 링크스 18번홀.
히코리 클럽으로 티샷하는 모습.
히코리 클럽으로 티샷하는 모습.

월드히코리오픈 둘째 날, 몬트로스 링크스에서 나만의 골프를 즐기다

지난달에 이어 내가 스코틀랜드에서 참가했던 월드히코리오픈 얘기를 계속하겠다. 개인전 둘째 날 경기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몬트로스(Montrose) 링크스(1562)에서 열렸다. 스코틀랜드에 현존하는 유서 깊은 링크스 코스가 모두 그러하듯, 몬트로스 링크스 역시 자연이 만든 미세한 굴곡이 특색이었다. 전날 플레이했던 프레이저버러는 고저 차가 심한 다이내믹하고 경쾌한 리듬감이 인상적이었다면, 몬트로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편평한 부지에 다양한 홀 레이아웃으로, 시각적인 화려한 자극은 없었지만 대회를 치르기에 좋은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은 유럽에서 참가한 남자들로 구성된 4인 1조에서 플레이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경기 직전에 주최 측이 나를 찾아와 난감한 표정으로 어려운 부탁이 있다며 사정을 했다. “너무도 큰 부탁인 건 알지만, 혹시 괜찮다면 어제와 같은 팀으로 플레이할 수 있겠냐”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초보자 에비타와 함께 플레이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정말 큰 부탁이긴 한데, 들어주겠다”라고 답했다. 좋은 스코어를 내는 것이 골프를 더 즐겁게해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삼십 년 이상 구력이 된 골퍼라면, 스코어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매일 잘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잘 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못 치는 날도 있다. 그게 골프다. 인생에서나 골프에서나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면, 과정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순간들을 놓치게 된다. 스코어에만 집착하다가 동반자와의 관계를 망칠 수도 있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모처럼 힐링 할 수 있는 기회를 스트레스로 채워 날려버릴 수도 있다.

이날도 에비타는 결연한 자세로 전날과 같은 골프를 이어갔다. 나는 이미 한 번 경험하여 익숙해진 터라, 그녀의 슬로 플레이에 관계없이 코스 사진을 찍고 홀마다 설계 수준을 평가하며 나만의 골프를 진행했다. 어차피 앞 팀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후반에 급격히 떨어진 집중력 때문에 스코어는 첫날에 이어 좋지 못했지만, 몬트로스라는 새로운 링크스 코스를 경험한 즐거움을 앗아가진 못했다.

오상준 소장의 아이언샷.
오상준 소장의 아이언샷.
개인전 대회가 열린 뉴버러 온 이선 골프클럽.
개인전 대회가 열린 뉴버러 온 이선 골프클럽.

경쟁을 떠나 최고의 결과를 이룬 진정한 도반

도반(道伴)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목적으로 도(道)를 수행하는 뜻이 같은 사람을 뜻한다. 함께 길을 떠난 동반자라는 의미의 도반만큼 골프에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월드히코리오픈 대회 개인전의 마지막 경기는 에버딘시 근교에 위치한 뉴버러 온 이선(Newburgh on Ythan) 골프클럽에서 열렸다. 나는 대회 결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코스를 즐기자는 마음으로 클럽에 도착했다.

골프백을 수동 카트에 싣고 걸으며 플레이를 해왔던 내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프로숍 직원에 따르면 몇 안 되는 수동 카트를 앞서 나간 골퍼들이 전부 가져가버린 바람에 남은 카트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케이, 그럼 할 수 없지. 짊어지고 플레이하자.’

평소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지면 판단이 빠른 편이다.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짐을 차에 내려놓고, 골프공도 다섯 개만 챙겼다. ‘집중하지 않아 다섯 개 모두 잃어버리게 되면 자동 실격이다.’ 그렇게 배수진을 친 하루가 시작됐다.

에든버러 학창 시절 동료들과 골프백을 짊어지고 치곤 했는데, 20년 만에 다시 골프백을 등에 업고 링크스로 나섰다. 함께한 동반자는 지난해 이 대회 남자부 그로스(Gross) 우승자 타쿠야 요시카와 씨, 남자부 네트(Net, 핸디캡 산정 점수) 우승자 유키노리 스즈키 씨, 그리고 일본히코리골프협회 사무총장 카츠 후쿠모토 씨였다. 나는 지난해 네트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서로가 상대방의 실력을 익히 보고 들은 바가 있어, 시작부터 그들의 존재감이 즐거운 자극이 되었다.

요시카와 씨는 20대 후반까지 일본과 아시아에서 프로골퍼 생활을 하다가 부상으로 은퇴하고 지금은 아마추어 골프를 즐기는 고수 중의 고수였다. 나와 같이 가벼운 골프백을 메고 페어웨이를 걷기 시작한 그의 샷이 내심 기대되었다.

홀이 거듭될수록 그의 쇼트게임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견고한 백스윙과 임팩트 후 피니시까지 한 번에 우아하게 힘을 조절하는 모습은 멋진 퍼포먼스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존재감은 나로 하여금 코스의 전략을 짜고 생각하는 골프를 하게 했고, 그전 이틀간의 골프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갖게 했다. 서로 맞붙어 싸우고 경쟁하지 않아도 격려와 자극이 되는 관계. 한곳을 바라보고 공통의 목표를 향해 묵묵히 함께 걷는 사이가 된 것이다.

둘 다 난생처음 쳐보는 난이도 높은 링크스 코스의 전반 9홀에서는 한 번씩 티샷을 가시금작화 숲속에 헌납하고, 동일하게 5오버파를 기록했다. 내 스코어를 그가 적고 내가 그의 스코어를 적어 제출하는 서로의 마커(Marker)역할을 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플레이에 방해가 되지 않게, 러프로 공이 빠졌을 때는 함께 찾으며 뉴버러 온 이선 코스의 후반 9홀에서 사이좋게 버디 한 개씩을 기록했다. 후반전의 스코어는 요시카와 씨 이븐 파, 나는 2오버파를 기록해 77과 79타로 최종라운드를 마무리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악수를 청하며 서로의 존재에 감사했다. 골프는 링 위에서 치고받아 승부를 결정하는 격투기가 아니다. 그와 나는 같은 목표를 공유하며 코스를 걸었고, 경쟁을 떠나 서로 곁에 있었기에 함께 최고의 결과를 이룬 진정한 도반이었다.

단체전에 참가한 한국과 스코틀랜드 연합팀.
단체전에 참가한 한국과 스코틀랜드 연합팀.
월드히코리오픈에 참가한 여성 골퍼의 모습.
월드히코리오픈에 참가한 여성 골퍼의 모습.

공을 다루는 기술보다 자신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는 골프

사흘간의 대회가 끝나고 시상식이 열렸다. 남자부 우승은 80/80/77타를 기록한 요시카와 씨였고, 나는 마지막 날의 선전에 힘입어 3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 대회에만 있는 50세 이상 시니어 부문 챔피언이 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도 얻게 되었다.

로리 매킬로이의 말처럼, 골프에는 정말 배울 점이 많다. 그 배움은 스코어가 아니라 태도에서 시작된다. 그린 위에서의 한 걸음, 한 마디, 한 번의 침묵이 우리가 어떤 문화를 가진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그 위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골프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골프는 ‘배움의 운동’이다. 공을 다루는 기술보다 자신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준다. 동반자를 존중하는 마음, 자연 앞의 겸손, 실패를 받아들이는 성숙함, 이 세 가지는 어떤 교육보다 값진 배움이다.

[ writer 오상준 ]

오상준 한국인 최초로 영국에서 골프코스 설계학 석사를 취득한 코스설계자이자 골프 인문학자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 <골프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역임했으며, <Golfweek> 코스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과 한국히코리골프협회(www.hickorygolfing.com) 회장으로 골프문화와 코스 미학을 탐구하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상준 한국인 최초로 영국에서 골프코스 설계학 석사를 취득한 코스설계자이자 골프 인문학자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 <골프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역임했으며, <Golfweek> 코스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과 한국히코리골프협회(www.hickorygolfing.com) 회장으로 골프문화와 코스 미학을 탐구하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