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오상준 소장 “인문학을 알면 골프를 좀 더 가치 있게 즐길 수 있다”
스코어와 비거리만 좇기보다 역사와 스토리, ‘좋은 코스’의 기준 같은 골프인문학을 알면 같은 라운드도 완전히 다른 경험이 된다.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오상준 소장이 말하는 우리에게 골프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숨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 인문학의 창조적 상상력이다.”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고 (故) 이어령 선생의 이 말은 인문학이 우리 삶을 어떻게 확장시켜 주는지 잘 보여준다. 골프 역시 스코어와 비거리라는 숫자를 넘어설 때, 비로소 하나의 문화가 된다. 오상준 소장은 그 보이지 않는 영역을 골프인문학이라는 언어로 풀어온 인물이다.
영국에서 골프코스 설계학 석사를 취득한 한국인 최초의 코스 설계자이자, 미국 <골프다이제스트>·<골프매거진>·<골프위크 (Golfweek)>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아시아인.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골프의 역사와 코스 미학, 그리고 ‘좋은 골프란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에게 골프인문학은 교양의 장식이 아니라, 골프를 더 깊고 가치 있게 즐기기 위한 하나의 시선이다.
골프인문학은 아직 낯설게 느껴진다. 골프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얼마 전 지인이 유명한 독서모임에 갔다가 골프 업계에 계신 분에게“골프인문학 하는 분이 있다”라고 했더니 “골프에도 인문학이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아, 우리가 골프를 치는 것에만 매몰 돼 있구나’ 싶었다. 더 멀리, 더 잘 치고, 스코어… 그 집착이 강하지 않나. 근데 음식이나 와인 그리고 미술·음악으로 비유하면, 많이 먹는다고 미식가가 되는 게 아니고, 많이 듣는다고 감상이 깊어지는 게 아니다. 알아야 더 즐길 수 있다. 결국 공부가 필요한데, 그게 인문학이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게 인문학이지 않나. 골프도 마찬 가지다. 역사, 코스 설계, ‘좋은 코스’의 기준, 코스의 뒷이야기를 조금만 알아도 우리가 쓰는 시간과 돈이 훨씬 가치 있어진다.
어느 나라 골퍼이든 더 멀리 더 잘 치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나. 맞다. ‘더 멀리, 더 잘 치기, 내기골프’ 이런 문화는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다. 미국·영국·호주 같은 나라 골퍼들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차이는 그 안에 ‘다양성’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한쪽에는 기록과 스코어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골프 역사·설계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덕후’들이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덕후들이 혼자 노는 게 아니라 소사이어티를 만들어 같이 파고든다는 거다. 그게 문화의 깊이를 만드는 것이고. 한국은 아직 그 층이 너무 얇다.
또 아쉽게 느껴지는 한국만의 골프문화가 있다면? 최근에 미국 골프전문가 16명이 한국에 와서 7개 코스를 함께 돌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분들이 “왜 한국 골퍼들은 벙커 정리를 안 하냐?” “왜 피치마크를 수리 안 하지?”라고 물어서 당황했다. 벙커 정리나 피치마크 수리 같은 건 골퍼의 책임이자 의무다. 그런데 한국 골퍼들이 ‘알면서도 일부러’ 안 한다기보다 누가 그걸 ‘의무’라고 처음부터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뭔가를 배워서 하는 걸 굉장히 잘하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슬라이스를 안 내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많은데, 룰과 에티켓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다. 우리는 운전 배울 때 법규부터 배우고 필기시험 보고 도로에 나가지 않나. 그런데 골프는 거꾸로다. 실기부터 하고 필기(룰·에티켓)는 관심이 없다. 해외 명문 코스에서는 피치마크 수리를 하지 않으면 멤버로 안 받는다. 실제로 ‘멤버십 테스트’ 같은 자리에서 그런 행동 하나로 탈락한다. 그정도로 엄격한데, 우리는 그런 룰과 에티켓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같아 아쉽다.
골프 에세이 <골프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면>에 이어 최근 40일간 유럽의 40개 코스를 라운드 한 경험을 책으로 엮어 <40/40>을 출간 했다. 골프를 통해 새로운 것들을 계속 도전해 나가는 것 같다. 나는새로운 걸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어렵고, 낯선 걸 일부러 선택하는 편이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벌어지겠지 하는 호기심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재미와 창의적인 순간을 마주하며 나를 더 알아가게 된다. 유럽에서 40일 동안 40개 코스를 도는 여정도 그랬고, 히코리 골프도 마찬가지다. 40일 동안 유럽과 영국의 코스를 돌면서 자연도 다르고, 문화도 사람도 다르고, 골프장도 모두 달랐다.
그 과정에서 골프를 치는 방식뿐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이나, 여행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도 많이 달라졌다. <40/40>은 그런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이 골프를 치는 사람뿐 아니라 골프를 안 치는 사람도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고, 나만의 스토리를 써 나가는 자극제가 됐으면 좋겠다.
40일간 40 코스를 도는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히코리 골프를 만난 걸로 안다. 히코리 골프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부분은? 겸손해진다. 왜냐하면 공이 잘 안 맞는다. 요즘 클럽들은 빗맞아도 관용성이좋아 가운데로 가고 거리 손실도 적다. 하지만 히코리 채는 빗맞으면 그냥 빗나가기 때문에 내가 정확하게 맞추려면 어떤 스윙을 해야 하고,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지고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낯섦에 빠지고 적응해 나가는 과정 자체도 즐긴다. 그래서 히코리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은 실수로 미스샷을 해도 그걸 그냥 받아들이고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한국히코리골프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나? 2024년 협회를 만들었고, 현재 회원 10명으로 아직 소수다. 1월 말~2월 중순까지 회원들과 함께 뉴질랜드를 방문해 크라이스트처치 골프클럽에서 열리는 뉴질랜드 히코리 골프 오픈에 참가한다. 그리고 9월에는 국내에서 ‘코리아 히코리 오픈’ 초대 대회 개최를 계획하고 있다. 국내에서 히코리 골프가 좀 더 알려져 보다 많은 분들이 히코리 골프를 즐기면 좋겠다.
세계 3대 골프 매체(다이제스트·매거진·위크) 100대 코스 패널을 모두 경험한 유일한 아시아인이다. 명문 코스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땅이다. 설계 업계에서는 “땅이 90%”라는 말이있을 정도다. 좋은 땅을 찾아내면, 도심 한복판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찾아간다. 반대로 수익성 때문에 비싼 땅을 피하고 산으로 올라가 산 비탈을 크게 깎아 만든 코스는 돈을 많이 들여도 ‘자연스러운 명코스’가 되기 어렵다. 반대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땅이라도 자연을 그대로 살려 만든 코스는 사람들이 큰돈을 들여서라도 찾아간다. 대표적으로 빌 쿠어와 벤 크렌쇼가 1995년 설계한 미국 네브라스카주의 샌드힐스 골프클럽이 그렇다. 처음에는 “거길 누가 가냐” 하는 곳이었지만 자연을 거의 그대로 살린 코스를 만들었더니, 사람들이 비행기 타고 찾아가고 회원으로 가입하고 싶어한다.
코스 설계에서 샌드힐스 골프클럽처럼 내추럴리즘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들었다. ‘만든 티’가 나는 코스에 대한 반작용이 컸기 때문이다. 2차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 말까지는 설계의 ‘암흑기’라 불린다. 골프 수요가 많아지니 골프장을 많이 찍어내듯 비슷비슷한 코스들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린 내추럴리즘 철학의 코스가 주목받으면서 흐름이 바뀌었다.
코스 설계도 하고 있는 걸로 안다. 좋은 땅이 없을 때는 코스 개발을 어떻게 해야 하나? 산을 깎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에도 매립지, 폐염전, 폐광 같은 버려진 땅을 개발해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사례가 있다. 개발자 입장에서도 이런 땅에 더 관심을 두면, 환경·지역·브랜드 스토리를 함께 만들 여지가 크다. 국내에도 환경적으로나 사업적으로 지속 가능한 코스 모델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재 호남지역 매립지에 건설된 코스 리모델링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다.
골프인문학자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40일 40코스’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 나갈 생각이다. 그래서 2024년에 아시아 6개국에서 40개 코스, 그리고 미국에서도 동부와 서부 40개 코스를 돌았다. 우선 2026년 8월쯤 아시아판을 낼 예정인데, ‘40일 40코스’ 시리즈의 아시아 버전이자 ‘아시아의 골프와 문화 가이드북’ 같은 형태로 기획하고 있다. 아시아인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이 읽어도 “아시아 골프가 이런 거구나” 하고 호기심을 갖게 하고, “더 많이, 더 싸게”가 아니라 더 좋은 코스를 알려주고 흥미를 갖게 하려고 한다. 정보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함께 녹여 재미있는 콘텐츠로 채울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