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뉴
  •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
  • 매경GOLF로고
    • 정기구독
  • 검색

[김미영의 언어의 스윙] “당신은 방금 벙커를 주문했습니다”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말의 함정 김미영의 언어의 스윙

  • 김미영
  • 입력 : 2026.01.12 19:21

벙커가 있으면 공이 꼭 그리로 가는 머피의 법칙. 단지 운의 문제일까?

사진설명

스스로에게 ‘초보 꼬리표’를 붙이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골프 아나운서로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내게 중요한 미션이 떨어졌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적인 대회, 유러피언투어(DP 월드투어) 발렌타인 챔피언십의 생중계였다. 현장은 어니 엘스, 이안 폴터 같은 스타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만 명의 갤러리로 뜨거웠고, 나의 부담감도 함께 커져갔다. ‘혹시 선수 이름을 틀리면 어쩌지?’ ‘설명하다 막히면….’ 심장은 마이크를 뚫고 나갈 듯 뛰었다. ‘오늘 진짜 실수하면 안 돼. 제발 실수하지 말자.’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실수하면 끝장이라는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결국 오프닝에서 나도 모르게 방어막을 치고 말았다. “제가 신입 아나운서라 많이 떨립니다. 혹시 실수가 있더라도 예쁘게 봐주세요.” 나로서는 솔직함과 겸손을 담은 양해의 표현이었다. ‘미리 신입이라고 말해두면, 실수해도 너그럽게 봐주겠지’라는 얄팍한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냉혹했다. 게시판은 응원이 아닌 질타가 가득했다. “신입 아나운서라고 해서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어요”, “이렇게 큰 대회를 왜 불안하게 신입에게 맡기죠?” 그때는 시청자들이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과 심리학을 공부한 뒤에 깨달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내가 만든 프레임에 나를 가두다

내가 ‘신입’과 ‘실수’라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시청자들에게 나는 그저 골프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그 단어가 소개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가 제시한 말이 나를 바라보는 ‘생각의 틀(Frame)’이자 ‘기준점(Anchor)’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라고 한다. ‘아나운서가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걱정의 레이더가 켜졌고, 작은 머뭇거림도 “신입이라서 그렇구나”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더 치명적인 것은 나 자신에게 건 프레임이었다. 스스로 ‘신입’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니 목소리는 더 떨렸고 행동은 위축됐다. “실수하면 안 된다”라고 다짐하던 말은 오히려 ‘실수’라는 단어에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만든 프레임 속에 나는 오히려 더 갇혀버린 것이다.

사진설명

“벙커를 피하자” 말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벙커를 겨냥했다

필드에 나가면 이 소름 돋는 장면이 똑같이 반복된다. 우리는 동반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이렇게 외친다. “오른쪽 벙커 피해야 해. 거긴 빠지면 끝이야.” 조심하라는 그 마음, 너무 고맙다. 하지만 우리 뇌는 짓궂게도 “피해야 해”라는 말을 흘려듣고, ‘벙커’라는 단어에 강렬하게 반응한다. 분명 내가 핀을 보고 있었는데도, 그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는 모래 구덩이 하나가 들어선다. 마치 내가 ‘신입’이라고 말하자 시청자들이 미숙함에 집중했던 것처럼, “벙커를 피해”라고 말하는 순간, 뇌가 벙커를 또 하나의 기준점으로 인식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시선은 본능적으로 벙커를 힐끔거리고, 어깨는 미세하게 열린다. “벙커가 있으면 꼭 공이 그리로 가더라”라는 머피의 법칙은 사실 운이 나쁜게 아니다. 우리 입이 ‘벙커’를 프레이밍 했고, 몸이 그것을 충실히 따른 과학적 필연일 뿐이다.

“실수하지 마” 하는 순간 실수가 시작된다

여기에 회피 프레임 언어가 쐐기를 박는다. “피해야 해” “하면 안 돼”라는 말은 뇌에게 위험 신호로 전달된다. 위협을 감지하면, 몸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Freeze)’ 반응을 보인다. 내가 생중계에서 “오늘 방송 실수하면 안 돼”라고 다짐할수록 목소리가 작아지고 혀가 굳었던 것과 같다. 한번 생각해보자. ‘공사 중, 추락 주의’ 표지판이 있는 길을 걸을 때, 성큼성큼 걷는 사람이 있을까? 평소보다 숨을 죽이고 발끝을 세워 조심조심 걷게 되지 않는가. 골프 스윙도 똑같다. “조심해!”라는 명령을 받은 근육은 시원하게 채를 던지지 못하고, 미세하게 수축하고 경직된다. 결과는 뻔하다. 공은 야속하게도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그 벙커로 빨려 들어간다.

회피(Avoid)하지 말고 타기팅(Targeting)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투어 현장에서 지켜본 선수들의 언어 습관은 명확했다. 그들은 두려운 대상을 입에 올리는 대신, 가야 할 곳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벙커 피하자” 대신 “소나무 끝 선을 보고 치자”. “물에 빠지면 안 돼” 대신 “페어웨이 왼쪽 공간이 넓게 열려 있어”. 뇌에게 ‘피해야 할 것(부정)’을 조심하라고 애쓰는 대신, ‘가야 할 곳(긍정)’을 선명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심리학회(APA)의 연구에 따르면 긍정적인 자기 대화(Self-talk)를 하는 선수가 그렇지 않은 선수보다 집중력이 16% 향상되고 실수율은 12% 감소했다. 말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결과가 달라진다는 확실한 증거다.

당신의 입은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다시 나의 방송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 뼈아픈 실수 이후, 나는 이제 오프닝 멘트를 할 때 ‘실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다른 프레임을 전달한다. “오늘,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플레이를 가장 생생하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실수’라는 언어 대신 “최고를 전하겠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시청자는 기대를 하고 나는 자신감을 얻는다. 딱 한가지만 기억하자. 벙커, 해저드, OB처럼 피해야 할 함정을 말하지 말고 당신이 공을 보내고 싶은 바로 그곳을 말하자. 그 순간, 당신의 골프는 이미 페어웨이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writer 김미영]

필자 김미영은 JTBC Golf 아나운서 출신으로 KPGA·KLPGA·LPGA 정규투어 현장에서 골프 전문 아나운서로 활동해왔다. 현재는 ‘영 스피치 컨설팅(Young Speech Consulting)’ 대표이며 스피치 및 미디어 인터뷰 코칭, KPGA 투어 프로 입문 교육과 클래스 A 커뮤니케이션 과정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15년 차 골프 아나운서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서 골프와 말의 리듬이 만드는 심리의 균형을 탐구한다.
필자 김미영은 JTBC Golf 아나운서 출신으로 KPGA·KLPGA·LPGA 정규투어 현장에서 골프 전문 아나운서로 활동해왔다. 현재는 ‘영 스피치 컨설팅(Young Speech Consulting)’ 대표이며 스피치 및 미디어 인터뷰 코칭, KPGA 투어 프로 입문 교육과 클래스 A 커뮤니케이션 과정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15년 차 골프 아나운서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서 골프와 말의 리듬이 만드는 심리의 균형을 탐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