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뉴
  •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
  • 매경GOLF로고
    • 정기구독
  • 검색

[오상준의 GOLF & CULTURE] 우리는 왜 낯선 곳을 갈망하는가

  • 오상준
  • 입력 : 2026.01.14 17:15
  • 수정 : 2026.01.14 17:19

여행은 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가장 생생한 방식이기도 하다. 유럽과 영국에 있는 40개의 코스를 40일간 순례하는 여정에서 운명적으로 히코리 골프를 만났던 오상준 소장. 그는 비거리와 스코어에 집착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나무 샤프트로 만든 히코리 골프채를 들고 자신만의 골프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다.

2024년 월드히코리오픈에 참가한 오상준 소장.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2024년 월드히코리오픈에 참가한 오상준 소장.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우리는 왜 휴가철이 다가오면 낯선 공간을 상상하는 걸까? 집은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인데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남는 시간이나 돈이 생겨서가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비행기 표를 예매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몸속에는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새로운 풍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뇌는 도파민을 분비해 가슴을 뛰게 한다. 여행지에서 활발히 움직이면 엔도르핀이 쏟아져 스트레스를 씻어주고, 함께 떠난 이들과 웃고 즐기는 동안 옥시토신이 분비돼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밝은 태양 아래 멋진 공간을 걷다 보면 자연이 주는 세로토닌이라는 행복 호르몬이 생성된다. 여행은 이렇듯 다양한 호르몬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비일상적인 경험의 연속이다.

이런 욕망은 우리의 뿌리 깊은 본능과도 이어진다. 미국의 생태학자 고든 오리언스 교수가 정의한 ‘사바나 가설(Savana Hypothesis)’과 같이, 인류는 오랜 세월 넓은 초원에서 먹이감을 찾아가며 생존해 왔다. 오늘날 우리가 낯선 공간, 드넓은 초원, 푸른 바다와 같은 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바로 이런 자연 환경을 탐험하던 기억과 생존 본능이 우리의 DNA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행은 단순히 쉬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본능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모험이다. 집은 안락함을 주지만, 낯선 세계는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우리는 짐을 꾸리고, 비행기에 오르고,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깨닫는다. 여행이란 결국 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가장 생생한 방식이라는 것을.

2024년 스코틀랜드 브로라 골프클럽(Brora Golf Club)에서 열린 월드히코리오픈 개인전 모습.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2024년 스코틀랜드 브로라 골프클럽(Brora Golf Club)에서 열린 월드히코리오픈 개인전 모습.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링크스 코스인 브로라 골프클럽에서 라운드 하는 골퍼의 모습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링크스 코스인 브로라 골프클럽에서 라운드 하는 골퍼의 모습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로열도노크 골프클럽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일본인 골퍼

나는 2년 전 가을, 유럽과 영국에 있는 40개의 코스를 40일간 순례하는 여정에 올랐다.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순례길은 프랑스와 아일랜드를 거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로 이어졌다. 자연환경과 문화가 각양각색인 골프장을 플레이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고장 특유의 음식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곳의 밤거리를 배회하다 들른 펍에서 술 한잔으로 여독을 달랬다.

이런 여정 중에 내 골프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 위치한 로열도노크 골프클럽에 들렀을 때였다.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라운드를 준비하고 있는데, 골프장 직원이 다가와 “조인할 골퍼가 있다”라고 했다. 잠시 후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의 동양인이 나타났고, 직원의 입에서 ‘미스터 유지 나카무라’라는 이름이 불렸다. 순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라고 생각했다. 그와는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근황을 알아가던 소셜미디어 친구였던 것이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하고 이름을 밝히니 그는 “우리는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었네요. 마치 자석이 서로를 끌어당기듯”이라 말했다.

그는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월드히코리오픈 세계대회 참가 후 홀로 여행 중이었다. 히코리 골프채를 처음 본 나는 라운드 내내 이런 새로운 골프문화에 호기심이 커져 갔다.

아쉬운 작별을 한 우리는 바로 다음 달에 그가 회원으로 있는 고베의 나루오 골프클럽에서 재회했다. 그곳에서 지금은 친한 친구가 된 일본 히코리골프협회 사무총장인 카츠 후쿠모토 씨의 히코리 채를 쳐봤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18번 홀 티샷을 감나무 헤드가 장착된 히코리 샤프트 드라이버로 쳤는데, 맞는 순간 둔탁한 소리(빗맞았던 게 확실하다)와 함께 낮게 오른쪽으로 날아간 공은 150m 전방의 러프로 들어갔다. 스위트 스폿에 맞으면 너무도 부드러운 감촉을 주지만, 빗맞으면 빗나가는 정직함이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월드히코리오픈에 참가한 골퍼들의 클래식한 선데이백.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월드히코리오픈에 참가한 골퍼들의 클래식한 선데이백.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히코리 골프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2024년 7월, 일본 교토 골프클럽을 방문해 미국에서 수입한 히코리 클럽세트를 인도받았고 그날 풀세트로 처음 플레이를 했다. 빗맞아도 가운데로 더 멀리 공을 보낼 수 있도록 설계된 최신 장비는 이제 내 사무실 한편에 먼지가 쌓인 채 잠자고 있다. 평균 8타 정도 스코어가 더 나오고 드라이브 비거리는 20% 줄어드는 히코리 채에 적응하기까지 ‘대체, 이 짓을 왜 하고 있나?’라는 의문이 들었던 힘든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만남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히코리 채로만 플레이를 한 지도 1년이 되어 간다.

여행 중 운명적으로 만난 일본인 골퍼. 그의 초대를 받아 처음 방문한 일본의 명문 나루오 골프클럽, 그리고 거기서 쳐 본 히코리 골프, 이런 비일상적인 경험이 이어져 참가하게 된 다양한 세계 각지의 골프대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골프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내가 누릴 수 있었던 특특권이었지만, 기회가 생겼을 때 주저하지 않고 이를 붙잡고 덤벼든 나의 무모함 덕분이기도 하다.

최근 한 모임에서 문정희 시인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여류 시인’이라는 명칭이 잘못된 표현이라 말한 시인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그’라 쓰겠다) 현대인들이 특히 대한민국인들이 얼마나 상투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를 비판했다. 남들이 원하는 물건을 갖고자 돈을 벌고, 남들이 떠나는 휴양지에서 부대껴가며 휴가를 보내고, 남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소셜미디어의 가상현실에서 남들의 삶을 엿보고 남들이 눌러준 ‘좋아요’에 매달리는 진부하고 뻔한 삶을 ‘클리셰(Cliché)’라 날카롭게 지적했다. 운율과 여백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용량을 키우고, 내가 소유한 언어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주도적 삶’을 살려면, 예술과 문학을 가까이해야 하고 내 생각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 강의의 핵심이었다.

우리는 지난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필연적인 상투적 삶 속에서 아주 가끔은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그동안 미뤄왔던 그 무언가, 내 마음 한편에 덮어 두었던 욕망 덩어리를 끄집어 내서들여다보고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욕망이 탈출한 빈 공간을 행복한 추억으로 채울 수 있다.

나는 히코리 골프로 그 빈 공간을 채웠다. 비거리와 스코어에 집착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골프의 600년 역사 중 처음 500년을 풍미했던 나무 샤프트로 만든 채를 들고 나만의 골프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다.

1나무 샤프트로 만든 히코리 골프채. 2 골프 역사 초창기 아이언. 3 골프 역사 초창기 때 사용된 페더리 골프공.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1나무 샤프트로 만든 히코리 골프채. 2 골프 역사 초창기 아이언. 3 골프 역사 초창기 때 사용된 페더리 골프공. (photo 오상준, Bruce Curtis)
히코리 골프를 즐기기 좋은 호주 케이프 위컴 골프 링크스.(photo 오상준, Bruce Curtis)
히코리 골프를 즐기기 좋은 호주 케이프 위컴 골프 링크스.(photo 오상준, Bruce Curtis)

타수보다 서로를 존중하며 즐거움을 나누는 골프문화

히코리 골프를 경험하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익숙해지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 골프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가짐으로 겸손함과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쉽게 지치지 않는다.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클럽을 통해 전달되는 샤프트의 탄성과 클럽페이스에서 느껴지는 반발력과 같은 손맛을 즐길 수 있게 되면 첫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전 세계 25개국에 분포된 2000여 명의 히코리 골퍼들은 자신의 미스샷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로운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멀리 치려는 욕심을 버리고 우아하고 리드미컬한 나만의 스윙을 추구하는 골퍼라면 골프 실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히코리 골프를 즐길 수 있다. 히코리 골프에서는 타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내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즐거움을 나누는 문화가 중요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골프채가 나오고, 더 멀리 더 똑바로 날아가는 골프공이 넘쳐나는 오늘, 데이터 분석과 다양한 훈련을 통해 퍼포먼스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21세기의 최첨단 골프문화를 뒤로하고, 100년 전으로 돌아가 골프의 전통을 추구하려는 히코리 골퍼는 현재 대한민국에 총 10명이 있다. 600만 골프인구의 0.000002%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숫자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룰과 에티켓을 지키며 환경을 사랑하는 골프의 전통을 공유하며 즐겁게 어울리고 있다. 한국히코리골프협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인 그들은 영국 전통 의상인 니커보커스를 입고 헌팅캡을 쓰고 나무 골프채를 들고 골프장에 나타나는 희귀한 부류의 골퍼들이다.

이들과 함께 지난 2년간 참가했던 영국, 일본, 중국의 히코리 골프 대회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들과 히코리 골프채를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내년 2월에는 따뜻한 남쪽나라, 뉴질랜드 남섬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열리는 제5회 뉴질랜드 히코리오픈에 참가한다.

‘더 멀리, 더 빨리, 더 많이’를 추종하는 시대에 천천히 여유 있고 활기차게 주도적인 삶을 즐기고 있는 10인의 히코리 골퍼. 그들의 미래에 어떤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히코리 골프가 그들 인생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드는 작은 수단이 되길 바란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대사

writer 오상준(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

오상준
오상준 한국인 최초로 영국에서 골프코스 설계학 석사를 취득한 코스설계자이자 골프 인문학자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 <골프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역임했으며, <Golfweek> 코스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과 한국히코리골프협회(www.hickorygolfing.com) 회장으로 골프문화와 코스 미학을 탐구하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