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뉴
  •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투브
  • 매경GOLF로고
    • 정기구독
  • 검색

[오상준의 GOLF & CULTURE] 걸어야 생각이 깊어지고, 골프도 더 잘 친다

  • 오상준
  • 입력 : 2026.03.10 16:00
  • 수정 : 2026.03.10 16:01

골프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려면 카트 대신 걷기를 선택해야 한다. 뉴질랜드의 파라파라우무 비치, 애로타운에서 캐디와 함께 걸으며 라운드 했던 경험은 코스를 읽고 생각하며 치는 골프의 본질을 되살렸다. 카트 대신 걸으며 플레이하는 전통을 지키는 최고의 골프클럽들처럼, 올봄엔 천천히 걸어보자. 걸어야 생각이 깊어지고, 골프도 더 잘 칠 수 있다.

뉴질랜드 파라파라우무 비치 골프클럽 코스를 걷고 있는 오상준 소장.
뉴질랜드 파라파라우무 비치 골프클럽 코스를 걷고 있는 오상준 소장.

요즘 유행하는 가요나 팝송을 들으면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 ‘훅(Hook)’이 도입부에 나온다. 3초 안에 승부를 봐야 노래가 팔린다는 얘기가 있듯이, 사람들은 새로운 노래를 들을지 말지를 첫 순간에 선택한다고 한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로 도입부부터 빌드 업시켜 ‘벌스(Verse)’에서 감정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던 과거의 노래와는 사뭇 다른 전개 방식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곳곳에 깊숙이 침투해서 삶의 리듬을 바꿔 놓았다. 패스트푸드, 패스트 트랙(승진, 학위 과정 등을 빠르게 진행하는 제도), 패스트 콘텐츠(쇼트폼 영상, 릴스, 틱톡 등), 패스트 딜리버리(당일, 즉시 배송 문화)가 일상이 되었고 ‘깊이’, ‘과정’, ‘지속성’보다 속도, 효율, 즉각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환영받고 있다.

합리적인 그린피의 파라파라우무 비치 골프클럽.
합리적인 그린피의 파라파라우무 비치 골프클럽.

골프 칠 때는 카트 타고, 건강 위해 헬스클럽에서 뛴다?

우리나라의 골프 문화는 어떤가? 7분 간격 티오프를 하고, 조금이라도 앞팀과의 거리가 벌어지면 골프장 측의 재촉이 시작된다. 골퍼들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간 상품처럼 착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한국 골프는 카트가 필수다. 골퍼들만 코스에 내보냈을 때 벌어질 정체를 막기 위해 5인승 카트를 캐디가 몰며 내장객의 속도를 조절한다. 자연 속의 여유를 찾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골프는 빨리 해장국 먹고 4시간 반 안에 라운드하고 근처 맛집에서 밥 먹고 귀가하는 루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산악지형 코스에서도 걷는 걸 선호한다. 동반자들의 플레이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코스를 걸으며 눈앞에 펼쳐진 공간을 탐색한다. 골프가 일상에서 벗어난 치유의 시간이 되려면, 패스트 포워드하듯 카트를 타고 이동해 공까지 가서 치고 카트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건강해지고, 걸어야만 힐링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골프 칠 때 힘들다며 카트를 타고 이동하는가 하면, 건강을 위해 헬스클럽 러닝머신 위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뛴다.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제대로 잘 치는 골프는 걸으면서 전방의 목표 지점을 스캔하고 공을 보내야 할 곳과 보내지 말아야 할 곳을 결정하며, 머릿속에서 내가 칠 샷의 모양을 그려볼 때 가능하다. 그린 위로 올라가면서 홀컵 주위의 경사를 읽으며 공이 놓인 지점의 사방을 살핀다. 이렇게 해야 코스를 이해하며 전략을 수립해서 골프를 잘 칠 수 있다.

파라파라우무 비치를 걸어서 라운드 하는 골퍼의 모습.
파라파라우무 비치를 걸어서 라운드 하는 골퍼의 모습.

합리적인 그린피에 골프의 본질이 살아 숨 쉬는 파라파라우무 비치 골프클럽

나는 지난 1월 말 서울을 떠나 뉴질랜드로 향했다. 남섬과 북섬에 있는 20개 구장을 방문하고 평가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리스트에 올린 골프장 중에 테 아라이 남코스, 티티랑기, 카우리 클리프를 제외하곤 모두 처음 가보는 코스였다.

12일 차까지 플레이한 코스는 총 11곳. 그중에서 단연 으뜸인 곳은 모두 캐디와 함께 걸었던 코스였다. 나와 동반한지인 3명의 의견도 같았다. 지극히 한국적인 골프 문화에 익숙한 그들도 최고로 꼽은 두 곳은 처음부터 끝까지 카트 없이 코스를 걸었던 북섬의 파라파라우무 비치 골프클럽(PBGC)과 남섬의 애로타운 골프클럽이었다.

뉴질랜드의 최고급 골프 리조트이자 세계 100대 코스인 테 아라이 코스를 치려면 18홀 그린피만 75만 원을 내야 한다. 하지만 10만 원도 안 되는 그린피를 내고 경험한 PBGC는 경이로웠다. PBGC는 영국의 세계적인 설계자 알리스터 매켄지 박사가 100년 전 호주 멜버른을 방문했을 때 로열 멜버른 웨스트 코스를 만드는 일을 보조했던 앨릭스 러셀이 1949년 뉴질랜드에 와서 설계했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12번에 걸쳐 뉴질랜드 오픈이 개최되었고, 2002년 당시 세계 랭킹 1위였던 타이거 우즈도 찾았던 전통적인 링크스 코스이다. 라운드를 했던 당일은 바로 전주에 2026 뉴질랜드 PGA 챔피언십이 열려 코스 상태가 최상이었다.

외형적으로 테 아라이처럼 장엄한 바다 풍경이나 모래언덕에 포진해 있는 벙커의 향연은 없었다. 페어웨이는 자연 그대로의 굴곡을 드러내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고, 심플한 레벳 벙커가 그린 좌우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정의하며 공략해야 할 지점과 피해야 할 지점을 다양한 샷밸류 난이도로 구성하고 있었다. 홀마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숫자로 절제된 벙커로도 극적인 경험을 끌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편평한 듯 보이지만 미세한 변화로 가득한 그린은 잠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했다.

반복해서 칠수록 그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골프의 본질이 살아 숨 쉬는 링크스. 77년 전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골프와의 관계를 미니멀하게 정의한 코스가 수백억 원을 들여 만든 현대식 코스를 능가한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코스를 누구나 합리적인 가격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한국에서 온 4인의 골퍼가 캐디와 함께 걸으며 제대로 된 골프를 만끽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비행기로 11시간 30분이 걸리고, 또 자동차를 타고 8시간 30분을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회원들이 직접 설계해 만든 애로타운 골프클럽.
회원들이 직접 설계해 만든 애로타운 골프클럽.

회원들이 손수 곡괭이와 삽을 들고 만든 코스, 애로타운 골프클럽

남섬의 퀸스타운은 도심에서 30분 거리에 뉴질랜드 톱 15위에 드는 골프장 중 4곳이 모여 있어 가히 골퍼들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그중 2007년 이후에 만들어진 잭스 포인트, 더 힐스, 밀브룩을 제치고 남섬 1위에 올라 있는 곳은 91년 전, 회원들이 직접 설계해 만든 애로타운 골프클럽이다.

1911년 6홀 레이아웃으로 시작한 클럽은 1935년 현 위치에 90에이커의 땅을 매입해 곡괭이와 삽을 들고 회원들이 손수 코스를 만들었다. 이렇게 개장한 9홀 코스에 1971년 도로 맞은편의 땅을 추가해 9홀을 더했다. 수십 년에 걸쳐 진화한 레이아웃을 자세히 뜯어보면, 자연 그대로의 지형 속에 이상적인 티잉 그라운드와 그린의 위치를 찾아내었고 그 사이 좁은 계곡의 ‘V’ 자형 공간에 절묘하게 페어웨이를 집어넣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90년 전에는 현대적인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언덕을 깎아내고 계곡을 메워 평지를 만드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불가능했다. 대신 회원들이 지형을 면밀히 관찰하고 공부해 골프에 최적화된 공간을 찾고 조금씩 다듬어 코스를 만들었다. 18홀 골프장 전체에 벙커는 한 개도 없고, 개울과 노출된 암반, 스키 점프를 할 수 있을 것 같이 솟아오른 자연지형 등이 코스의 해저드 역할을 했다. 백 티에서 5409m밖에 안 되는 짧은 전장이라고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코스였다. 좁은 페어웨이를 정확한 티샷으로 공략해야 했고, 이에 어울리는 작은 그린은 주변 경사와 지형에 잘 들어앉아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난이도를 지니고 있었다. 짧지만 까다로운 코스라는 특징과 변화무쌍한 지형이 만들어낸 난이도의 성격이 비슷한 코스가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에 있는데, 1898년 설립된 5395m 전장의 보트 오브 가르텐(Boat of Garten)이 바로 그곳이다.

장엄한 리마커블(Remarkable) 산맥과 와카티푸(Wakatipu) 호수의 경관이 아름다운 잭스 포인트와 억만장자 오너인 마이클 힐이 설치한 거대한 조각상들로 유명한 더 힐스에 비하면 애로타운은 시설 면에서 그야말로 동네 골프장이었다. 소박한 클럽하우스는 제대로 된 라커룸도 없었다. 하지만 코스만을 놓고 평가한다면 의문의 여지없이 애로타운이 월등했다.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살려 만든 애로타운 골프클럽.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살려 만든 애로타운 골프클럽.

미국 최고 회원제 클럽에서는 카트 대신 캐디와 함께 걸으며 플레이

파라파라우무 비치 골프클럽, 애로타운 골프클럽처럼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살려 만든 곳을 캐디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건 골프만이 줄 수 있는 신선한 경험이다. 2인승 카트로 페어웨이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플레이했던 더 힐스와 잭스 포인트는 천천히 음미하며 코스를 경험하는 즐거움이 없었다. 1930년대에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2인승 골프 카트는 결국 멀쩡한 사람도 걷지 않고 골프를 칠 수 있게 만든 미국의 발명품이 되었다. 미국식 패스트푸드처럼 편리함을 주지만 동시에 게으름을 조장했고 걷는 골프의 전통과 가치를 희석시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자랑하는 배타적인 최고 회원제 클럽들인 파인밸리나 오거스타 내셔널, 사이프러스 포인트나 메리언은 캐디와 함께 걸으며 플레이하는 전통적 방식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걷기와 골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이런 상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부러울 것 없는 그들은 왜 카트를 타지 않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에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의 공원을 산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걷기는 사유를 위해 뇌를 활성화하기 위한 루틴이었다. 걷기는 신체의 반복운동을 통해 뇌를 안정적으로 각성시키는 이상적인 생활습관이다. 가끔 전화 통화 중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걸으면서 대화를 할 때 아이디어가 더 잘 떠오르고 생각이 잘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아마 뇌가 신체에 명령을 내린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걸어라, 생각해라 그리고 행동해라.

골프를 시작하면 건강이 좋아져 더 이상 자신을 만나러 올 일이 없을 거라 설파했던 내과의사 출신 코스 설계자 알리스터 매켄지 박사의 건강학에는 걷기가 기본이었다. 스크린골프가 줄 수 없는 즐거움, 카트 타기만을 고집하면 알 수 없는 즐거움, 새봄이 오면 걸으며 치는 골프를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writer 오상준(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

한국인 최초로 영국에서 골프코스 설계학 석사를 취득한 코스설계자이자 골프 인문학자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 <골프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역임했으며, <Golfweek> 코스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과 한국히코리골프협회(www.hickorygolfing.com) 회장으로 골프문화와 코스 미학을 탐구하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영국에서 골프코스 설계학 석사를 취득한 코스설계자이자 골프 인문학자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 <골프매거진> 세계 100대 코스 선정위원을 역임했으며, <Golfweek> 코스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아시아골프인문학연구소 소장과 한국히코리골프협회(www.hickorygolfing.com) 회장으로 골프문화와 코스 미학을 탐구하는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