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영 아나운서의 언어의 스윙] 골프화는 왜 벗을 때마다 아쉬울까
달리기가 에너지를 시원하게 쏟아내는 마침표라면, 골프는 아직 할 말이 조금 더 남아있는 말줄임표 같다.
“아… 개운해. 이 맛에 뛰지.” 새벽 공기를 가로지르며 러닝을 마칠 때의 그숨은 유난히 달다. 땀에 젖은 러닝화 끈을 풀 때면, ‘오늘도 해냈다’는 생각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어제보다 기록이 늦어졌어도 크게 아쉽지 않다. 내일 조금 더 빨리 뛰면 되니까.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냈다는 성취감. 마치 하루의 마침표 하나를 또렷하게 찍은 기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골프는 다르다. 18홀이 끝난 뒤, 동반자 중 한 명은 어김없이 이런 말을 한다. “아… 이제 잘 맞기 시작했는데... 딱 한 홀만 더 치면 진짜 잘 칠 것 같아”, “아쉽다. 아까 그 바람만 안 불었어도… 전반에 그 어프로치만 붙였어도…” 골프화를 벗을 때는 늘 미련이 묻어난다. 똑같이 땀 흘려 운동을 했는데 왜 골프는 유독 이런 아쉬움이 남는 것일까
스코어 카드에 찍히지 않은 땀방울
사실 골프가 끝날 때마다 미련을 남기는 저 말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심지어 아쉬움이 너무 커 골프 자체가 싫었던 적도 있다. 골프 아나운서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골프를 전혀 칠 줄 몰랐던 나는 수습 기간 동안 빠르게 실력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 무리한 목표를 세웠다.
3개월 안에 100타 깨기. 하루에도 몇 시간씩 연습장을 지켰고 쉬는 날이면 되도록 라운드를 갔다. 열정만 놓고 보면 정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땀방울은 스코어 카드에 그대로 찍히지 않았다. 101타. 102타. 목표를 놓친 날이면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골프는 다른 운동과 본질부터 다르다는 것을. 달리기는 정직하다. 내가 뛴 시간과 쏟아낸 에너지가 고스란히 결과로 나타난다. 하지만 골프는 다르다. 완벽한 스윙을 해도 갑자기 부는 돌풍에 공이 궤도를 이탈하기도 하고 억울하게 파인 디봇에 공이 빠지기도 한다. 수많은 변수를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스포츠이다 보니 연습장에서 땀을 흘린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날도 숱하다. 그래서 많은 골퍼들이 18홀을 마치고 이렇게 말한다. “다시는 골프 안 친다.” 하지만 다음 날, 우리는 또 골프백을 메고 있다. 그야말로 끊어낼 수 없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럼, 이 예민한 스포츠를 직업으로 삼는 투어 프로들은 어떨까? 골프를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그들의 언어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프로는 통제할 수 있는 것만 본다
2025년 LPGA 에비앙 챔피언십. 세계 최고의 무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선수가 누가 있을까. 하지만 역시 골프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당시 아쉬움이 가득한 채 경기를 마치고 남긴 두 선수의 인터뷰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다들 아시다시피 골프는 잘하려고 하면 더 안돼요. 오늘처럼요.
저 오늘 진짜 잘 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차라리 못하려고 하면 더 잘하는 것 같아서, 내일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해 보려고요.” (이소미 선수)
“어제 라운드 내내 답답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그게 골프인것 같아요. 제가 준비한 대로 다 하는 게 저의 최선이지 않나 싶어요.” (김아림 선수)
두 선수의 담담한 고백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골프란 애초에 내 마음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님을 쿨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명확하게 구분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바람도, 라이도, 날씨도 우승도 내가 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루틴을 지키는 것. 이들은 스스로 100% 통제할 수 있는 목표에만 철저하게 집중한다.당신의 목표는 ‘명사’로 쓰여 있나요? ‘동사’로 쓰여 있나요? 선수들이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주 흥미로운 언어적 특징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목표는 대부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쓰여 있다는 점이다. ‘겨우 품사 하나 다르다고 대단한 차이가 있을까?’싶을 수 있다. 하지만 언어 심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작은 차이가 스윙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코스 위에서 간절하게 좇는 목표들을 떠올려 보자. ‘버디’, ‘우승’, ‘라베(라이프 베스트)’. 모두 명사다. 명사는 결과표에 박제된 멈춰 있는 글자다. 그래서 목표가 명사로 정해지는 순간 그것은 그저 닿고 싶은 막연한 ‘꿈’일 뿐 지금 당장 내 몸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일러주지 못한다. 반면 선수들의 목표는 다르다. ‘내 루틴에 집중하겠다’, ‘준비한 템포대로 스윙하겠다’, ‘이 과정을 즐겨 보겠다’. 모두 살아 움직이는 ‘동사’다. 동사는 그 자체로 행동이다. 결과가 어찌 되든 지금 내 근육과 마음이 해낼 수 있는 행동을 명확하게 지시한다.
달리기를 할 때를 다시 떠올려 보자. 우리는 기록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한다. ‘오늘 출근 전에 30분이라도 뛰어야지’라며 행동(동사)을 먼저 말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골프화를 갈아 신는 순간,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기록(명사)부터 목표를 잡는다. ‘100타’, ‘싱글’, ‘베스트 스코어’, ‘버디’. 모두 결과를 나타내는 명사들이다. 변수가 많은 골프라는 스포츠에서 내가 완전히 지킬 수 있는 단 하나뿐이다. 공 앞에 서는 나의 태도와 행동. 당신의 목표는 통제할 수 없는 명사인가. 아니면 끝까지 붙잡을 수 있는 동사인가.
말줄임표 대신 마침표를 남기는 법
어쩌면 골프는 스코어를 줄이는 스포츠이기 전에 결과 대신 행동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스포츠인지도 모른다. 바람도, 잔디도, 공이 떨어지는 자리도 우리가 통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루틴을 지킬지 다음샷에 다시 집중할지는 언제나 내가 선택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날 스스로 정한 작은 행동 하나라도 지켜냈다면 그 라운드에는 이미 단단한 마침표 하나가 찍힌 셈이다. 아마 그날 골프화를 벗는 순간, 우리는 새벽 러닝을 마쳤을 때처럼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오늘 진짜 개운하게 잘 쳤다.
writer 김미영(아나운서·영 스피치 컨설팅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