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준의 GOLF & CULTURE - 전통의 품격과 현대의 감각이 공존하는 홍콩 골프
과거 아시아에 거주하던 영국의 엑스팻이 뿌린 골프 문화의 씨앗은 홍콩에서 독특한 클럽 문화를 꽃피웠다.
홍콩골프클럽과 쉑오, 클리어워터 베이와 디스커버리 베이를 통해 오래된 전통과 현대적 변화, 그리고 좋은 코스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타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특히 주재원들을 ‘엑스팻(Expat)’이라 부른다. ‘엑스팻’은 라틴어 어원인 ‘Ex(밖으로)’와 ‘Patria(조국·고국)’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는데, 과거 아시아에 거주하던 영국의 엑스팻들이 이곳에 골프 문화를 전파한 주인공들이었다.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일본 등에서 19세기에 골프가 시작됐는데, 19세기 말 한반도에서도 원산에 거주하던 영국인 상인들이 골프를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이들은 타향에서 만난 동포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기 시작했고, 그들이 거주하던 도시 근교의 유휴지에 코스를 만들었다. 골프가 이들 소사이어티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최고의 스포츠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사이어티, 즉 회원제 골프클럽은 엑스팻과 지역의 영향력 있는 토착인 들과의 사교의 장도 만들어 줬다.
영국의 엑스팻이 만든 홍콩골프클럽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1889년 영국 식민지 시대에 9홀 코스로 클럽을 설립했는데, 코스 부지는 현재 경마장으로 유명한 해피밸리에 위치했다. 그 후 골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 홍콩 섬 남쪽 바닷가의 딥워터베이(Deep Water Bay)에 9홀 코스를 만들었고, 1911년에는 홍콩 북쪽 끝, 중국 본토와 접경지역인 판링(Fanling)에 정규 18홀인 올드 코스를 건설했다. 홍콩골프클럽은 그 후 1931년 뉴 코스, 1969년 이든(Eden) 코스를 더해 54홀 규모가 되었다.
홍콩골프클럽, 식민지 사교장에서 금융도시의 네트워크로
도심을 출발해 홍콩골프클럽에 가기 위해 자동차 공업사, 중고차 시장이 즐비한 좁디좁은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굽이 굽이 산길을 따라가면 뉴 테리토리가 나온다. 홍콩 도착 첫날 오후, 이곳의 이든 코스에서 라운드를 시작했다. 날 초대해 준 허먼 왕은 지난해 한국에서 만난 인연으로 난생처음 홍콩에서 골프를 쳐보는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줬다. 허먼은 홍콩 최고의 클럽 피팅 전문가인 토니 휘와 친구 월리엄을 초대해 함께 플레이를 했다.
이든 코스는 홍콩에 오기 전 플레이했던 일본과 한국 골프장에서 만난 풍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자연환경이 인상적이었다. 클럽하우스 주변에서 시작된 파크랜드 스타일의 코스는 울창한 열대림 사이로 홀을 배치했고, 좁고 고저 차가 심한 산악지형으로 이어져 홀의 생김새에 맞게 샷의 모양(Shot Shaping)을 만들어 가는 재미가 있었다. 코스 중반에 이르자 코스 부지의 가장 높은 곳에서 멀리 중국 본토 선전(Shenzhen)의 마천루가 보였다.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 후 설립된 홍콩골프클럽은 홍콩 주재 영국 상류사회의 사교 공간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홍콩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국계 사업가와 전문직도 회원이 되기 시작했고,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뒤에는 영국인 회원 비율이 감소함과 동시에 홍콩 중국인과 중국 본토 기업가의 수가 증가했다.
홍콩골프클럽은 영국식 회원제 전통과 운영 방식을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 회원 구성만 중국계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홍콩이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로 성장하는 과정과 맞물려, 회원제 골프클럽이 단순한 운동 시설을 넘어 비즈니스와 사회적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을 보여준다.
시간이 멈춘 듯한 홍콩의 클래식 코스, 쉑오컨트리클럽
관광객들에게 익숙한 몽콕과 침사추이가 홍콩의 전부는 아니다. 홍콩의 풍경은 생각보다 다양했고 내가 아는 크기를 초월했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골프장으로 가는 길은 새로운 홍콩의 모습을 알게 해줬다. 그중 하나가 둘째 날 방문한 쉑오(Shek O) 컨트리클럽이다. ‘쉑-오’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된 건 침사추이와 홍콩 아일랜드를 잇는 해저터널을 지나 쉑오(Shek O, 石澳) 공원에 들어섰을 때 만난 이정표 덕이었다.
바위로 된 만(Rocky Bay)라는 뜻의 홍콩 섬 동남쪽에 위치한 이 지역은 홍콩사람들이 주말에 도시를 떠나 해변을 산책하거나 서핑을 하기 위해 찾는 곳이다. 산토리니 같아 보이는 절벽 위 촘촘히 들어선 주택지역과 보트가 떠 있는 바다를 끼고 놓인 해안도로를 한참 달리니 쉑오컨트리클럽에 도착했다.
1921년 설립 당시는 홍콩에 살던 부유한 영국인들이 유일한 회원이었다.
파3, 7개 홀과 파4, 11홀로 파65, 4727야드의 짧은 코스는 마치 스코틀랜드의 프레스트윅,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올드 타운클럽과 일본의 고베 골프클럽을 합성해 놓은 것 같았다.
전반 9홀의 코스 부지가 탁 트인 구릉지의 땅 한 덩어리에 자연지형을 살려 홀을 배치한 것은 페리 맥스웰의 올드타운클럽을 닮았고, 파5 홀 없이 파3와 파4 홀로만 구성된 레이아웃은 고베 골프클럽을 닮았으며, 페어웨이를 두 개 홀이 함께 공유하다 보니 전 홀의 그린을 넘겨 티샷을 하는 홀이 여럿 있는것은 초창기 프레스트윅의 형태와 흡사했다.
홍콩히코리소사이어티의 데이비드 카이의 소개로 쉑오의 회원인 저스틴과 그의 친구 제프와 플레이를 했다. 오전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호우주의보가 있었는데, 우려했던 것처럼 두세 홀을 치고 나니 폭우가 쏟아졌다. 중국풍의 그늘집에서 내가 가져온 럼을 마시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는데, 결국 천둥까지 치기 시작해 클럽하우스로 돌아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오후 2시가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멈추고 하늘이 밝아졌다. 오후에는 클럽하우스 반대쪽에 위치한 후반 홀들을 플레이한 후, 오전에 천둥 때문에 못 쳤던 8번과 9번 홀도 마저 플레이했다. 쉑오는 손수 골프백을 메고 치거나 캐디를 고용해야 한다. 전동 카트는 물론이고 그 흔한 수동 카트도 없다. 클럽하우스도 100년 전 식민지 시대에 홍콩에 지어진 서구식 저택의 건축 스타일이었는데, 아담하지만 격조 높은 건물이 이곳의 역사성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됐다.
파3로 시작하는 1번 홀과 클럽하우스 쪽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플레이해야 하는 2번 홀을 제외하면 10번 홀까지의 전반 8개 홀은 언제 다시 플레이하더라도 지루하지 않고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홀들이었다. 영국의 스윈리 포리스트나 미국의 사이프러스 포인트처럼 소수의 회원들만 즐길 수 있는 코스를 플레이한 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데이비드, 저스틴, 제프와 함께 영국식 플러스-포 바지를 입고 히코리 클럽으로 플레이한 것도 오래 간직할 추억이 됐다.
홍콩 4개 코스가 알려준 좋은 골프장의 조건
홍콩의 골프장은 크게 식민지 시대의 ‘전통 영국식 클럽’과, 1980년대 이후 등장한 ‘현대 리조트 클럽’으로 나뉜다. 전자는 홍콩골프클럽(HKGC, 1889)과 쉑오컨트리클럽(Shek-O, 1921)이 대표적이고, 후자는 클리어워터 베이(CWB, 1982)와 디스커버리 베이 골프클럽(DB, 1983)이 좋은 사례이다.
전형적인 브리티시 프라이빗 클럽은 엄격한 드레스 코드, 식사예절, 클럽하우스 문화를 고수하는 ‘사회적 신분 커뮤니티’인 반면, 현대 리조트 클럽은 실용적이고 국제적인 클럽 문화와 골프를 포함한 비즈니스와 가족 중심의 사교모임을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
코스의 특성을 보면, 100년 전 설립된 HKGC와 Shek-O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린 특성이 돋보이며, 과거 좋은 부지를 선점하여 대규모 토목공사 없이도 코스를 만들 수 있었던 장점이 있었다. 반대로 1980년대 초 미국의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와 넬슨 & 하워스에 의해 디자인된 클리어워터 베이와 디스커버리 베이는 코스를 건설하기 까다로운 해안절벽과 산악지형에 대규모 토목공사로 드라마틱한 골프환경을 조성한 사례이다.
코스평가자(Course Rater)의 눈에는 좋은 땅을 골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린 코스가 심미적으로도 더 훌륭하고 플레이의 전략성도 뛰어나 보인다. HKGC 이든 코스의 3번부터 10번, Shek-O의 3번부터 10번까지의 8개 홀이 홍콩에서 가장 기억에 남으며 다시 플레이하고 싶은 골프 홀들이었다.
반면 CWB는 좁은 해안 절벽 부지에 코스를 끼워 넣다 보니 페어웨이 폭이 좁고 그린 주변에 다양한 플레이 지역을 만들 공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반달 모양으로 바다를 향해 돌출된 절벽 위로 뻗어 있는 2번과 3번 홀이 아름다운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해안절벽에 억지로 홀을 끼워 넣어 눈에는 드라마틱하지만 플레이에는 문제점이 많은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에 있는 웨이하이 포인트 골프클럽이다. 반대로 골프에 딱 맞는 해안절벽 부지에 코스를 앉힌 사례가 사우스케이프 오너스 클럽이다.
DB의 경우는 산악지형에 홀을 배치하다 보니, 파3 홀을 제외한 거의 모든 홀에서 티샷은 물론이고 그린을 공략하는 어프로치샷까지 블라인드샷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평소 영국 전통 링크스 코스에서 볼 수 있는 빈번한 블라인드샷에는 거부감이 없었는데(링크스 코스의 특성상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많으므로), 산악지형에서 그린을 향한 어프로치샷이 블라인드인 경우는 미세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깊은 관목과 숲이 공을 삼켜버려 눈살이 찌푸려진 게 사실이었다.
결국 좋은 골프장은 골프 홀 18개가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는 환경 속에 초보자부터 상급자까지 자기만의 플레이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변별력을 갖춘 홀을 설계자가 구현했을 때 탄생한다는 사실을 홍콩을 대표하는 4개의 코스에서 다시금 확인했다.
130년의 레이어가 쌓인 홍콩 골프 문화
설립 초기에는 홍콩에 주둔한 영국인들만 즐길 수 있었던 식민지 통치하의 엘리트 사교 클럽이었던 HKGC과 Shek-OCC는 1970, 1980년대 이후 중국계 홍콩인들의 진입이 확대되었고,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에는 본토 출신 중국인들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CWB와 DB에서는 한국, 일본 회원 들과 그들의 가족을 포함한 다양한 골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통과 변화, 권력과 자본, 영국과 중국 사이 그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오랜 식민지 문화와 중국 반환 이후의 변화의 물결 등등 다양한 키워드로 가득한 홍콩 골프 문화. 나와 같은 외국인이 단 한 번의 방문으로 이해하기에는 불가능한 130년간 켜켜이 쌓인 역사와 문화의 단층(Layer)이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올 11월에는 홍콩에서 플레이해 보지 못한 유일한 코스, 카우사이 차우(Kau Sai Chau) 골프장을 방문할 예정이다. 100년 전 사용된 히코리 골프 클럽으로 플레이하는 차이나 히코리 오픈 대회에 참가할 예정인데, 홍콩에서 유일한 대중제 골프장 54홀은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