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넘어 전설이 된 이름, 박인비
세계 여자골프 무대에서 ‘골프 여제’로 군림하며 LPGA투어 21승에 올림픽 금메달까지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인비. 완벽을 향한 집념과 흔들림 없는 평정심으로 한국 여자골프의 상징이 된 그는, 이제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 아이와 함께하는 평범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수로서, 엄마로서 여전히 빛나는 박인비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인비’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레전드’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LPGA투어에서 통산 21승을 기록 중인 그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4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또한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는 여자 골프 금메달까지 품에 안으며 세계 최초로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우기도 했다.
이 화려한 업적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완벽을 향한 집념과 무수한 반복 훈련,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냉철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늘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했고, 그 과정에서 세계 여자골프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그는 ‘한국 여자골퍼’가 세계 골프계에서 어떤 위치에 설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 선수들의 경쟁력을 견고하게 만든 주춧돌이자 후배들에게 꿈과 가능성의 상징이 된 것이다.
최근 박인비는 ‘골프 여제’의 무게를 내려놓고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인기 육아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남편 남기협 코치,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출연해 일상 속 작은 순간에서 또 다른 행복과 기쁨을 채워 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한 손엔 골프채 대신 아기 젖병을 들고, 필드 위의 냉철한 챔피언 대신 두 아이를 돌보는 평범한 엄마로서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경쟁과 기록의 세계를 잠시 내려놓고, 이제 한 사람의 ‘엄마’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는 박인비를 만났다.

최근 <슈퍼맨이 돌아왔다> 예능을 통해 ‘엄마’ 박인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즘 일상이 궁금하다. 요즘은 특별한 스케줄 있는 날을 빼면 거의 집에서 아이들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사실 일상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전부라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낸다. 예전에는 일이 계속 있으면 힘들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한 번씩 일하러 나오는 게 좋을 때가 많더라. 육아에서 잠깐 벗어나 밖에 나오는 시간이 오히려 ‘쉼’처럼 느껴질 줄은 예전엔 몰랐는데,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든다(웃음).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게 된 이유가 있나. 처음에는 한두 편만 하고 안 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촬영을 할 때마다 그날은 온전히 아이들을 위한 하루가 되더라. 남편과 둘이 육아를 하면 귀찮고 번거로워서 안 하게 되는 것들도, 촬영 날엔 일부러라도 하게 되니까. 아이들을 위해 더 신경 써서 하루를 만들고, 그게 영상으로 남는 점도 좋았다.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서 계속하게 됐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으면 세상 바라보는 눈이나 가치관이 바뀌기도 하더라.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뒤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면. 연년생 둘을 키우다 보니 정신이 너무 없어 깊게 생각할 틈은 사실 잘 없다. 다만 “엄마들이 우리를 어떻게 키웠을까” 하는 공감 포인트가 생겼다. 늘 일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집에서 아이 키우는 일도 못지않게 큰 스트레스가 있더라. 엄마들이 멀티로 집안일도 하고, 남편 식사도 챙기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일하러 나오는 시간이 자유처럼 느껴질 만큼(웃음).
아이들이 예체능에 소질이 있어 보이던데, 교육 철학은. 재능을 빨리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예체능이든 공부든 아이가 잘하는 걸 어릴 때부터 발굴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경험하게 하면서 본인 적성에 맞고 잘하는 일을 자유롭게 찾게 해주고 싶다. 너무 틀에 박히지 않게 키우려 한다. 만약 골프에 재능이 있고 아이가 좋아한다면, 우리 부부가 가장 잘 아는 종목이니 시행착오 없이 바른 길로 안내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골프에도 재능이 있어 보이던데. 아직 재능을 논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지금은 공에 관심이 많고, 유치원에서도 예체능 활동을 좋아한다고 하더라. 우선은 체육 쪽을 몇 가지 시켜보며 잘하는 걸 찾아주려 한다. 골프도 당연히 우선순위로 시켜볼 생각이다.
아이들을 보며 ‘나를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나. 첫째 인서가 무의식중에 “아빠, 이거 갖다 줘” 같은 걸 시키는 모습이 나를 닮은 것 같아 깜짝 놀랄 때가 있다(웃음). 남편도 “엄마 따라하네” 하면서 놀라곤 한다.
세계 골프 정상에 올라선 뒤 행복한 가정을 이룬 모습을 보고 롤모델로 생각하는 후배 선수들이 많은 걸로 안다. 프로 선수들은 투어를 뛰다 보니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항상 대회 때문에 이동해야 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다 보면 안정적인 삶을 꿈꾸게 된다. 나 또한 한 집에 계속 머문다든지 집밥을 먹는다든지, 또 일정하게 회사에 출퇴근을 하는 직업 등 이런 일상과 일반적인 것들이 부럽게 느껴졌다. 나와 반대되는 것들을 갈망하게 되니까. 하지만 프로 선수로서 지금의 일을, 지금 느끼는 삶을 충분히 만끽했으면 좋겠다.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 그 자유를 많이 느끼길 바란다. 내가 지금 경험하는 일상도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게 되는 길이고, 또 반대로 프로 선수 때의 생활과 감정이 그리울 때도 많다.
MBTI가 ISFJ라고 들었다. ISFJ로 나오는데 주변에선 “너 F 아니야”라는 말도 한다. 나도 T 성향이 좀 있는 것 같긴 하다. 테스트하면 F로 나오긴 하지만 수치가 50:50 정도로 왔다 갔다 한다. 일에 있어서는 좀 철저한데, 개인 생활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편하게 놔두는 편이다.
골프에서는 ‘완벽주의자’로 통한다. 골프에서 완벽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면이 있다. 요즘엔 자주 치지 않다 보니 결과가 내 생각대로 안 나온다. 그래서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들 외에 다른 사람들과의 라운드는 좀 안 하려고 한다. 완벽하지 않은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싫고, 원하는 기량을 다시 끌어올리려면 엄청난 연습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 인스타그램을 통해 V157 멤버들(박인비를 비롯해 최나연·이보미·김하늘·신지애·이정은·유소연 7명이 2019년 모임 결성 당시 거둔 우승 횟수)과 라운드 한 걸 봤다.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는데, V157 멤버들은 어떤 존재인가. 프로 선수 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라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많고, 만나면 늘 즐겁다. 유소연 프로가 막내이자 총무 역할을 잘해줘서 분위기가 더 좋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하다 보면 학교 친구 개념이 별로 없는데,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골프를 했던 친구들이라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서로 나눌 수 있는, 정말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가족 외에도 소중한 존재를 꼽으라고 하면 V157 멤버들일 만큼.
함께 라운드 할 때 경쟁심은 없나. 재미로 내기를 할 때는 당연히 구찌도 넣고 경쟁심도 있다. 그런데 현역은 지금 신지애, 이정은 선수 두 명뿐이라, 현역이 아닌 우리는 ‘쪽팔리지 않을 정도로만 치자(웃음)’ 하는 분위기다.
정식 은퇴를 하지 않았는데, ‘은퇴’에 대한 생각은. ‘은퇴’에 대해선, 골프선수에게 진짜 은퇴가 있나 싶다. 시니어 투어도 있고, 영구 시드도 있으니까. 10년, 20년 뒤를 지금 어떻게 알겠나. 현역으로 당장 뛰진 않더라도, 골프선수로서의 끈은 조금 남겨두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다. 마음이 바뀌면 대회에 나갈 수도 있는 거고. 다만 현재 현실이 녹록하진 않다.
복귀 생각이 들기도 할 텐데. 복귀 생각보단 “그때가 정말 자유롭고 좋은 삶이었구나”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멋진 코스에서 매일 경기하고, 끝나면 저녁 시간을 누리던 그 일상이…. “그때 더 많이 즐길 걸…” 하는 아쉬움이 더 크다. 현역 땐 여유가 없고 예민하다 보니 투어 외에는 다른 것들을 많이 보고 경험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골프대회 TV 중계는 챙겨 보는 편인가. TV에 커버를 씌워서 아예 안 보게 해놨다. 아이들이 두 돌 될 때까지는 미디어 노출을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덩달아 잘 안 보게 됐다. 요즘엔 아이들 동요 듣고 책 읽어주는 게 일상이다. 드라마나 영화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웃음) 젝시오 앰배서더로 오랫동안 활동해왔다. 한 번 맺은 인연은 오래 이어가는 것 같다. 선수에게 잘 맞는 클럽을 만나는 건 정말 중요하다. 어릴 때 좋은 클럽 회사를 빨리 만나 큰 시행착오 없이 길게 함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파트너십을 이어준 젝시오에 고마운 마음이 크고, 나와도 클럽이 잘 맞아서 좋다. 그래서 앰배서더로 활동할 때도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레 최선을 다하게 되더라.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스타일이라서.
‘더 시에나’ 앰배서더로도 활동 중인데. 개인적으로 차분하고 뉴트럴한 컬러를 좋아하는데, 더 시에나 라이프 의류들이 컬러감이나 디자인이 고급스러운 느낌이어서 좋다. 제주에 있는 더 시에나 리조트에 초대도 해주셔서 아이들과 다녀왔는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가족처럼 잘 챙겨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2024년 IOC 선수위원에 출마했지만 안타깝게 낙선했다. 어떤 경험과 교훈을 얻었나. 거의 20년을 골프라는 종목 안에서 보냈는데, 지난 도전을 통해 다른 종목 선수들이 어떻게 운동하고 어떤 환경에 처했는지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스포츠 행정은 후배들을 위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기회가 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생각이다. 선수 출신으로서 현장을 잘 알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조금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인비 인비테이셔널’을 다시 열 계획은. 아이를 갖고 낳으면서 신경을 많이 못 썼던 것 같다. 선수들도, 팬분들도 많이 좋아해 주셨던 대회여서 좋은 후원사를 만나면 다시 개최하고 싶다.
LPGA투어에서 뛰는 후배들과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1년 내내 돌아다니며 투어를 뛰느라 정말 고생이 많을 거라는 걸 잘 안다. 한국에서 열심히 응원하고 잘 지켜보고 있으니 좋은 소식 많이 들려주면 좋겠다. 팬분들은 내가 요즘 대회에 안 나오니까 재미없다는 얘기를 많이 해주시더라(웃음). 두 아이 잘 키우며 잘 지내고 있고, 내가 없어도 여자골프·남자골프 모두 꾸준히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다른 방식, 다른 기회로 인사드릴 테니 잊지 말고 기억해주시면 좋겠다.